[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복사 3부와 분쇄기의 추억 (11)
- 이해의 오해가 빚어낸 사과... 어색하게 들릴 수 있는 언어의 차이
'시집온 새색시 벙어리 삼 년이요, 귀머거리 삼 년이요, 장님 삼 년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며느리가 불필요한 말과 듣고 보는 것을 삼가고 인내하며 지혜롭게 처신해야 함을 이른다. 현대적으로는 새로운 공동체나 관계에서 초기에는 겸손하게 배우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넓은 이해심을 가져야 한다는 보편적인 지혜를 담고 있다.
이곳 개성공단 생활이 바로 그러했다. 말은 통했지만,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특히 행동반경과 언어 등을 극도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에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새로 직원으로 함께 근무하는 북한 출신 김명옥 직원(향후 가끔 동무라고 표현)의 근무 시작은 지난해 12월 28일이었다. 우리 주재원도 그 북한 출신 신입직원 앞에서 모든 행위를 새색시처럼 삼가야 했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등 그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통상 신입직원이 입사하면 반갑게 맞이하고 업무를 분장하며 가르쳐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우선은 상호 간 아니 북한말로 호상 간 눈치만 살피는 생활이 한 달여 되는 시점이었다.
은행, Green Doctor 간이병원, 패밀리마트가 입점된 같은 건물의 한 식구가 된 상황에서 샴푸, 비누, 치약 같은 생필품을 전달하며 나름 챙겨주려 했지만, 우리 주재원이나 그나 서로 언어 사용에 있어 민감한 부분은 극도로 조심하며 '이 말은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였다.
소위 말하는 그들의 지도자와 남북의 경제적 차이 비교 등은 아예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더구나 이 직원이 오후 5시면 그들끼리만의 공간에서 '생활총화'라는 회의에 참가하여 당일 있었던 이야기들을 미주알고주알 모두 보고하고 토론하는, 소위 우리가 들은 대로 비판하는 시간이 있다기에 삼가 말을 줄이고 행동을 줄이며 조심하고 있던 언어적 차이의 일이 터졌다.
은행 본부와의 귀중한 계약문서를 복사하던 중이었다.
나는 김명옥 동무에게 "세부 복사 부탁해요"라 했는데, 그는 이를 "세분(細分)하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분쇄기에 파쇄시키는 기가 막힌 상황이 발생했다. 부행장까지 사인받은 KPI 즉 핵심성과지표인 목표계약서를 분쇄기에 갈아버렸으니,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본인도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김명옥 동무는 손 편지를 내 책상 위 결재판에 넣어 조용히 놓고 퇴근했나 보다. 유일하게 20년이 지났지만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그의 손글씨를 그대로 적는다.
"윤석구 선생님, 아까는 정말로 죄송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3부를 뜨라는 말씀을 세분하라는 소리로 잘못 들어서 그렇게 한 것이니 널리 량해 해 주십쇼. 무슨 말로 다 표현하였으면 좋을련지 모르겠으나 선생님이 넓게 생각하시고 리해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말로 하자니 선생님을 마주 대하기가 미안하여 이렇게 글로써 올리니 욕 많이 하십쇼. 명옥"
우리가 함께했던 그 시간들은 단순한 직장 생활을 넘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복사 세부'와 '분쇄기'의 추억은 비록 단순한 언어 이해의 실수에서 시작되었지만, 내게는 소통의 본질을 일깨워준 중요한 배움의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특히 김명옥 신입직원의 편지에서 "욕 많이 하십쇼"라는 표현은 북한 사회에서 '꾸짖음을 달게 받겠다'는 의미의 겸손한 표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는 언어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처럼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진심 어린 사과와 '량해'와 '리해'를 구하는 그 마음,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인간미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 마음을 전했던 그 날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미소 속 그 손 편지, 개성공단의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참고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오늘 연재 글 등으로 인해 어떠한 일이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솔직히 조심스러운 마음도 사실이다.
필자. 당시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