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귀향길 5일차 2, 길위의 현자를 만나다.

by 윤석구

길 위의 현자를 만나다. 퇴계 귀향길 5일차.


걷는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하늘이 주는 선물이다.


양근성지를 향해 정처없이 걷던 중, 일행 중 한 분과 자연스럽게 말동무가 되었다. 역사와 인문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분이었다.

이야기는 강창(江倉)과 해창(海倉)으로 시작되었다. 강가의 창고가 강창, 바닷가의 창고가 해창이다. 해남 해창막걸리의 그 해창이 바로 바닷가 창고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했다. 한글 전용 시대에 한자 뜻이 사라지면서 지명의 의미마저 잊혀졌지만, 지명은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서원으로 흘렀다. 그분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명재 윤증의 큰아버지이신 동토 윤순거 선생께서 의령현감으로 재직하실 때, 퇴계 이황 선생과 추강 남효온 선생의 사우(祠宇)를 건립하셨지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맞장구를 쳤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선생께서는 영월군수로 재직하실 때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하여 『노릉지(魯陵志)』를 편찬하시고, 결국 노릉지는 노산군 즉 단종의 묘가 장릉으로, 사육신의 복권 등 크나 큰 역할을 있었지요."


가슴이 뛰었다. 동토 윤순거 선생은 논산 노성의 윤문의 학당인 종학당을 건립하신 문중의 선조이시다. 퇴계 선생을 사우에 모시고, 억울하게 쓰러진 단종의 기록을 남긴 분, 그분의 후손인 내가 지금 퇴계 선생의 길을 걷고 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도 깊은 인연이었다.


현자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양근성지(楊根聖地)에 닿아 있었다.
양근성지는 조선 천주교 도입기에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한 권철신(암브로시오)과 한국 천주교 창립의 주역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가 태어난 땅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주어사(走魚寺)에서 유교 경전을 토론하다 서학(西學)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곳이며, 신부도 없이 평신도들이 2년간 미사를 집전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된 곳이기도 하다. 그 대부분은 끝내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퇴계 선생이 이 강을 건널 때, 이곳은 아직 고요한 강가 마을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 뒤, 이 땅에서 목숨을 건 신앙의 역사가 펼쳐질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양근성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도 모르게 오래된 기억 한 토막을 꺼냈다. 1994년과 1995년, 현직 은행원 시절 명동성당 교무금 파출 수납을 담당하던 때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성당 안에서 마주치는 김수환 추기경님은 언제나 먼저 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그래, 윤 군 왔구나. 수고가 많아요."


양근성지의 순교자들도, 김수환 추기경님도, 결국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살다 가신 분들이었다.


걷는다는 것은 땅의 역사를 몸으로 읽는 일이다. 오늘 이 길에서 나는 퇴계 선생의 자취와 선조의 발자취와 순교자들의 피를 동시에 밟으며 걷고 있다.


남한강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길은 여전히 이어진다.


호젓한 남한강 자전차길을 걷다가 점심식사를 위해 양평시내 한 복판으로 들어서니 신호등에 자동차에 더구나 심화되는 발목통증 밥맛이 나지 않는다.


2026.4.3. 한국콜마 연수원 21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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