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귀향길 5일차 3. 넌 할수 있어

by 윤석구

넌 할 수 있어!
— 퇴계 귀향길 5일차


결국 발목통증에 마음이 항복을 선언했다.
양평 시내에서 점심을 마치고 다시 출발했지만, 압박붕대를 감은 발목은 더 이상 버텨주지 않았다. 개군면 휴양지 퇴계귀향길 재현단 일행의 중간 휴식지까지 버스를 타고 먼저 이동했다.


파스를 뿌뿌리고 눈을 붙인 꿀 같은 한 시간 후, 물 한모금 마시고 깊이 숨을 들이쉬니 발목이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버스를 탔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4일 하고 5일째 오전까지 80여 킬로미터를 걸어왔다. 더 이상 무리했다가 앞으로 남은 9일간의 완주를 못하는 것보다는, 한두 시간 쉬어주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버스 이동은 포기가 아니라 완주를 위한 선택이었다.



쉬어가는 공원인 개군면 체육 공원에서 눈에 띈 것이 있었다.
화장실 지붕 위에 당당하게 올라앉은 황소 조형물, 오늘 이 길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존재였다. 발목 걱정도 없고, 23킬로미터를 걸을 필요도 없으니.


조금 더 걷다 보니 소달구지를 끄는 황소 조형물이 또 나타났다. 순간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퇴계 선생은 배를 타고 가셨으니, 나는 소달구지를 타고 가면 어떨까. 버스도 탔는데 소달구지라고 못 탈 것 없지 않은가. 평등의 길로 해석하면 퇴계 선생님도 용인해 주실 것 아닐까.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소 목에 목걸이까지 걸려 있었다. 패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넌 할수있어!"


소달구지를 끌어야 하는 소에게 건네는 응원인지, 아니면 발목이 아파 버스를 탄 나에게 건네는 말인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넌 할 수 있어. 다시 일어나 걷는다.


재현단 일행이 만발한 개나리와 팍 터지기 직전의 벚꽃 몽오리 환영속에 도착했다. 버스 도착 지점 좌우로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산수유 축제가 이미 봄의 장관을 예고하고 있었다.



마음속 욕구가 꿈틀댔다. 하루번갈아 조별대표 한명이 퇴계선생 역할을 수행한다. 내일이면 우리조인 5조의 퇴계 역할이 다른 조로 넘어간다. 목적지 이포나루까지,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용기를 냈다.
오전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실존 인물 엄흥도 선생의 후손이신 분께서 퇴계 역을 훌륭히 수행하셨다. 그분께 정중히 말씀드렸다.


"따지고 보면 노릉지를 집필하신 동토 윤순거 저의 선조님 덕분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단종릉이 장릉으로, 사육신도 복권되고, 엄홍도 대장도 오늘날 1,400만 명의 성원을 받는 국민 인물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 동토 선생 후손도 일일 반나절, 퇴계선생 역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퇴계 정신 아닐까요."


둘째 날 클로드 등 AI 글쓰기 사용법을 전수해드린 인연도 있으셔서인지, 흔쾌히 수락하셨다. 퇴계 선생을 상징하는 누런 삼베옷이 내 어깨에 걸쳐지는 순간 몸가짐이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말 한마디, 걸음 하나, 시선 하나에 고매한 인품이 배어나야 했다. 감히 선생을 흉내 낼 수는 없지만, 그 마음만큼은 온전히 품고 걷고 싶었다.


서너분 전문 카메라맨의 촬영 속 퇴계선생 귀향길 집례관인 국제퇴계학학회 이광호 회장님을 보좌하고 이포포구로 첫발을 내딛는다.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길은 여전히 이어진다. 그리고 오늘, 나는 퇴계가 되었다.


2026.4.3. 밤 9시 누우런 삼배도포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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