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 귀향길 재현 6일차 1, 도산서원, 그 논쟁의 땅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 6일차 아침이다.
이번 여정의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한국콜마 아카데미(여주) 식당에서 어제보다 더 구수한 된장국으로 아침을 열었다. 집밥처럼 따뜻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전날의 종착지였던 이포나루에 다시 모였다.
안동 도산서원 일정으로 이틀간 자리를 비우셨던 김병일 원장님께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원장님께서 안 계시니 여주 이포의 하늘이 뻥 뚫린 듯 허전하게 느껴졌습니다. 잘 다녀오셨는지요.”
원장님은 자애로운 미소로 답을 대신하며 말씀하셨다.
“하늘이 뻥 뚤렸다. 그래요 오늘도 퇴계 선생께서 신륵사 앞 조포나루의 물살을 거슬러 안동으로 향하시던 그 길을 함께 걸으며 많이 배우고 생각도 나누어 봅시다.”
오후에는 신륵사 맞은편 나루터에서 퇴계 선생과 겸재 정선의 자취를 갈무리해 보겠다는 안내를 마치고, 원장님은 강둑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기셨다.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잔잔한 이슬비가 내렸다.
도포 위에 우의를 걸쳐 입으니 들떴던 마음과 걸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런 날은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더없이 좋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길 위에서 문득 스민 물음이 빗물처럼 마음속에 번진다.
100m 쯤 걸었을까. 어제 양평 양근성지로 향하던 길에서 조선 유학에 대해 깊이 있는 강론을 들려주셨던 한국인문사회연구원의 이한방 교수님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교수님의 설명이 시작되자 워락 명품 강의라 일행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늦추고 귀를 기울인다. 비 내리는 강변 길은 어느새 낮은 목소리가 흐르는 작은 강의실이 된다.
당초 오늘 글은 여정의 흐름을 중심으로 담아보려 했다. 그러나 길 위에서 마주한 이 교수님의 말씀을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아쉬움이 너무도 컸다. 하여, 이 기록에서는 그 말씀의 궤적을 따라 길과 생각이 함께 흐르도록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교수님이 조용히 화두를 던지셨다.
“도산서원 종향(從享) 논쟁을 아십니까?”
빗소리 위로 얹히는 그 한마디가 오늘 길의 깊은 화두가 되었다.
퇴계 이황 선생이 1570년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은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서원이 기틀을 잡아가며 필연적인 논의가 뒤따랐다.
누구를, 어떤 위계로 모실 것인가. 학문의 전당은 예학과 명분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장으로 변모했다.
논의의 중심에는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있었다. 15세에 퇴계 문하에 들어와 스승의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지키며 간병과 장례, 문집 간행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제자였다.
그를 도산서원에 어떻게 모실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당대 유림의 뜨거운 쟁점이었다.
1610년대에 들어 조목을 종향하자는 논의가 본격화되자, '배향(配享)'과 '종향(從享)'의 위계 차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는 단순한 예법의 문제를 넘어, 인물에 대한 평가와 학통의 위상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특히 위패에 스승과 같은 '선생'이라는 호칭 대신 '조공(趙公)'이라 낮추어 써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그것이 과연 진정한 예우인가를 두고 날 선 공방이 오갔다.
이 논쟁을 정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였다. 서애 유성룡의 문인이자 당대 예학의 권위자였던 그의 판단은 논의의 향방을 갈랐다. 하지만 원칙을 중시한 그의 결단을 두고, 일각에서는 자신의 학통을 고려한 정략적 해석이 아니냐는 시선이 교차하기도 했다. 학문적 논리와 인간적 관계가 미묘하게 얽힌 지점이었다.
이한방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걷다 보니, 빗속의 강물이 새롭게 다가온다. 저 물길 위로 얼마나 수많은 논의와 갈등이 씻겨 내려갔을까. 그것은 오직 학문을 위한 순수한 고뇌였을까, 아니면 명분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권위였을까.
잠시 걸음을 늦추며 생각에 잠긴다. 한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릴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그 시대가 지향하는 질서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의 문제였음을 깨닫는다.
결국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한 분을 중심에 둔 엄격한 향사 구조를 지켜나가는 길을 택했다. 제자들을 함께 모시는 문제는 끝내 신중하게 제한되었다. 한 사람의 학문을 온전히 기린다는 것은, 어쩌면 여러 사람을 앞세우기보다 본질적인 중심을 더욱 또렷이 세우는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퇴계 선생은 당신을 둘러싼 이 모든 치열한 과정들을, 저 흐르는 강물처럼 그저 담담히 바라보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2026.4.4 여강 뚝방을 걸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