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귀향길 6일차 2, 理와 氣, 그 오래된 싸움

by 윤석구

퇴계 선생귀향길 재현 6일차 2, 이(理)와 기(氣), 그 오래된 싸움


이한방 교수님의 퇴계귀향길 움직이는 조선유학 강의는 문묘 배향 이야기로 넘어갔다.



발걸음이 조금 느려진다. 내용이 무거워질수록 걸음도 천천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517년 정몽주를 시작으로, 1609년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이 문묘에 배향되면서 조선오현이 완성됐다. 그 후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가장 먼저 꺼낸 카드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배향이었다.

남인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반대 논리는 두 가지였다. 율곡은 젊은 시절 금강산에서 한때 불문(佛門)에 의지했다. 그런 사람을 성현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느냐. 우계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는데 따라나서지 않았다. 나중에 광해군을 따라 활동했으니 임금을 능욕한 것 아니냐. 거기에 기축옥사 때 동인들이 대거 희생되는 동안 수수방관했다는 책임론까지 더해졌다.

60년을 싸웠다. 1682년, 사육신 복권과 장릉·노산릉 복원의 물결을 타고 우율이 마침내 문묘에 들어갔다. 그러나 7년 후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이 왕비가 되면서 쫓겨났다. 다시 5년 후 갑술환국으로 장희빈이 밀려나자 복귀했다. 정치의 파도가 성현의 위패를 밀었다 당겼다 했다.

그 논쟁의 뿌리에는 이기론이 있었다. 퇴계와 율곡의 철학적 대립이 문묘 논쟁의 학문적 배경이었다.

이(理)는 사단이다.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 인의예지라는 인간의 도덕 본성이다.

기(氣)는 칠정이다. 희로애락애오욕, 인간이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과 욕망의 총체다.

퇴계의 주장은 이랬다. 이도 발하고 기도 발한다. 이발기수, 이성이 먼저 발동하면 감정이 따라온다.

기발이승, 감정이 먼저 치솟더라도 이성이 올라타 조율한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하며, 교육과 수양을 통해 이성이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맹자적 낙관론이다.

율곡과 기대승은 고개를 저었다. 현실을 보라. 기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는 그것을 뒤따라가며 합리화할 뿐이다. 인간은 본성대로 화도 내고 슬퍼하고 욕망을 품는다. 이가 왜 본선이라 할 수 있느냐.

기발이승일도설, 결국 기가 발하는 한 가지 길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퇴계는 “인간은 이성으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고, 율곡은 “현실에서 감정이 이성보다 강한 게 사실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500년 전의 논쟁이지만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매일 그 싸움 속에서 살고 있다.

1558년 봄, 스물셋의 율곡이 성주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예안 도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쉰여덟의 퇴계를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이틀을 머물며 학문을 논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율곡이 먼저 시를 올렸다.

“살림이란 경전 천 권뿐이요, 행장은 두어 칸 초가뿐일세.” 퇴계는 율곡이 떠난 뒤 제자 조목에게 편지를 썼다. “후생가외라는 옛말이 진실로 나를 속이지 않았네.”

두 사람은 그날 이후 평생 편지를 주고받았다. 견해는 끝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불일치가 조선 성리학의 두 맥을 만들었다.

나는 아무리 두 석학의 말씀을 들을 때뿐이었다. 답은 듣는 데 있지 않고, 걷는 데 있었다. 퇴계 선생의 귀향길을 따르는 재현단의 발걸음은 어느새 이릉교에 이른다. 길 위의 사유는 끝나지 않았고, 강물은 여전히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퇴계 귀향길 6일차 1 도산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