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귀향길 6일차 3, 상복 한장이 나라를 뒤흔들다.

by 윤석구

퇴계선생 귀향길 재현 6일차 3, 상복 한 장이 나라를 뒤흔들다


강변 어느 집 마당귀에 수백 년은 됨직한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굵고 거친 줄기에 흰 꽃봉오리가 막 터지려 하고 있었다. 비에 젖은 봉오리들이 수묵화처럼 번졌다.

여강(驪江)의 물줄기는 내 고향 세도 반조원과 다름없다. 강변 수양버들에 새순이 돋아나고, 이맘때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봄철 우어(웅어)가 올라온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갈치 사촌처럼 생긴 그 생선을, 어머님은 깨끗이 손질하여 한석봉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인절미 썰듯 가지런히 채 썰어 온갖 양념으로 비벼 횟무침을 만드셨다. 거기에 한산 소곡주 한 잔. 그 맛과 그 손길이 유난히 생각나는 봄날이다.


그런데 봄날의 정취도 잠시, 이한방 교수님의 강의가 17세기로 접어들었다. 걸음을 옮기며 듣는데, 이야기가 점점 격해진다. 상복(喪服) 한 장을 두고 나라가 두 쪽이 났다는 예송논쟁 이야기다.


1659년, 효종이 갑작스레 승하했다. 그러자 조정에 난데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상복을 몇 년이나 입어야 하는가.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사소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국가의 중대사였다. 예법이 곧 정치였고, 정치가 곧 예법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효종의 지위였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다. 맏아들 소현세자가 먼저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렇다면 효종은 장자인가, 차자인가. 장자로 보면 어머니(계모)가 3년 상복을 입어야 했고, 차자로 보면 1년이었다.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차자임을 들어 1년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했고,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에 해당한다 하여 3년복을 주장했다. 표면은 상복 논쟁이었지만 속은 달랐다. 효종을 차자로 보는 순간 효종의 왕위 계승 정통성이 흔들렸다. 서인은 신권(臣權) 중심, 남인은 왕권(王權) 중심의 논리를 각각 깔고 있었다.
이 논쟁의 중심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있었다.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자 당대 서인의 최고 권위자. 그는 기년복이 맞다고 주장했다. 남인 윤선도가 나서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고 공격했고, 예송은 단순한 예론 토론에서 이념 대립으로 격화됐다. 결국 1차 예송은 기년복으로 마무리되며 서인이 표면상 승리했다.


그런데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5년 후인 1674년, 이번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승하했다. 똑같은 질문이 다시 나왔다. 자의대비가 며느리 상에 몇 달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서인은 9개월 대공복(大功服)을 주장했고, 남인은 1년 기년복을 주장했다. 이번엔 현종이 직접 나서서 남인의 손을 들어줬다. 15년 치 쌓인 분노였다. 서인은 대거 축출됐고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2차 예송, 갑인예송(甲寅禮訟)이었다.


상복 한 장이 정권을 바꿨다. 조선이 예(禮)로 세운 나라임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을까.


송시열은 이 논쟁의 핵심 인물로 평생을 살았다. 서인이 집권하면 조정의 중심이었고, 남인이 집권하면 귀양길이었다. 그런 송시열을 사후에 문묘(文廟)에 배향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율곡의 학통을 이은 서인의 종장(宗匠)으로서, 조선 성리학의 정점에 선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1717년 사계 김장생이 먼저 문묘에 들어갔다. 그 다음엔 양송(兩宋), 즉 송시열과 송준길을 함께 배향하자는 논의가 일었고 1756년에 성사됐다. 이어 신독재(愼獨齋) 김집을 올리자는 논의가 나왔다. 그러자 정조가 제동을 걸었다. "김장생 아버지도 들어갔는데 아들까지 들어가는 건 좀 과하지 않소?" 그 대신 호남의 공자라 불리던 하서(河西) 김인후가 1796년 문묘에 들어갔다. 1764년에는 소론 출신이지만 학문만큼은 인정받은 박세채도 배향됐다. 1883년엔 신독재 김집과 중봉(重峯) 조헌 등이 추가되면서 문묘 배향 인물은 총 18명이 됐다.


문묘 배향의 역사는 결국 조선 학문 권력의 역사였다. 누가 성현의 반열에 오르느냐는 단순히 학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학파가 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았느냐를 선언하는 일이었다. 퇴계 학파와 율곡 학파, 남인과 서인이 수백 년에 걸쳐 그 자리를 놓고 다퉜다.


여강의 물소리가 강의 너머로 들린다. 퇴계 선생이 거니셨던 이 강변에서 그 모든 논쟁의 뿌리를 생각한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무엇인가. 강물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오늘도 그저 흐른다.


2026.4.4 이포나루에서 여강을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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