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귀향길 8일 차 5, 1000원짜리에 지폐에 나오는 인물
충주 시내 한복판을 걷는 일이 묘하게 즐거웠다. 도포와 갓 차림의 일행이 가구점, 사무용품점이 늘어선 골목을 줄지어 걷는 모습이 이 도시 사람들에게는 진풍경이었을 것이다. 선거철이기도 했다. 충주시장 예비후보 현수막이 건물 외벽에 크게 걸려 있었다. 조선 선비들이 현대 선거판 한복판을 걷는 셈이었다. 퇴계 선생이 이 광경을 보셨다면 뭐라 하셨을까. 웃음이 번졌다.
충주 시장 앞에서 뜻밖의 만남이 있었다. L 군이었다. 천안 벤자민 인성영
재학교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이 귀향길 재현 행사를 찾아온 학생이었다.
"학생은 왜 이 행사에 참여했어요?"
"선생님 추천으로 왔어요."
"나는 퇴계 선생의 경(敬)을 공부하고 성찰하면서 퇴계 정신을 함양하고자 참여했어요. 그런데 학생은 퇴계 선생이 어떤 분인지 알아요?"
학생이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1000원짜리에 나오는 분이잖아요."
순간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퇴계 이황 선생은 천 원권 지폐의 주인공이시다. 그러나 선생의 삶과 사상을 모른 채 지폐 속 인물로만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럼 학생, 경(敬)이 뭘까요?"
경을 질문하는 사이, 학생은 순발력 있게 네이버 검색을 통해 답을 찾아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그다음 경 아닌가요?"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숫자의 경(京)과 공경의 경(敬)을 네이버까지 동원해 찾아낸 순발력만큼은 칭찬해 줄 만했다. 퇴계 선생이 평생 강조하신 경(敬)은 숫자가 아니다. 마음을 늘 깨어 있게 하고 흐트러지지 않게 삼가는 자세, 공경할 경(敬) 자다.
학생이 벤자민이라는 이름의 학교에 다닌다기에 물었다.
"벤자민이 어떤 분인지 알아요?"
"미국 초대 대통령이요."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미국 초대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을. 미국 초대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이다. 일부러 물어본 것이었다. 학생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슬쩍 떠본 것이다.
천진한 학생의 엉뚱한 대답들이 오히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더 또렷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퇴계 선생의 경(敬)도 결국 같은 정신이 아닐까. 충주 시장통 한복판에서 고등학생과 나눈 짧은 대화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우리은행 충주지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33년을 몸담았던 그 이름이 충주 시내 한가운데 서 있었다. 제주도에서 홀로 걷던 그 힘든 날들, 마지막 날 제주금융센터 우리은행 간판을 보는 순간 한숨과 눈물이 울컥 쏟아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 또 여기서 만났다. 퇴계 선생의 귀향길 한복판에서, 도포를 입은 채로.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신의 계시가 아닐까. 갓을 쓴 채 내 고향, 나의 일터였던 우리은행 충주지점을 배경으로 셔터를 눌렀다. 웃고 있었지만 눈시울이 뜨거웠다.
가구상가 등 상가 거리가 끝날 무렵 관아골에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건물이 나타났다. 지금의 산업은행 전신으로, 강경에도 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강경근대문화역사관으로 사용 중인 그 건물과 얼마나 닮았는지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관아골 아트뱅크라는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있었다. 그 건물 좌측으로 충청감영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