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 귀향길 9일차 2편, 중원(中原)의 땅을

by 윤석구

퇴계 선생 귀향길 9일차 2편, 중원(中原)의 땅을 떠나며



충청감영 마당을 나서며 발걸음을 세었다. 마즈막재까지 5킬로미터. 도포 자락을 여미고 갓을 바로잡으며 재현단 일행은 천천히 충주 시내를 빠져나갔다. 봄볕이 따사로웠다. 길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흰 도포 자락과 뒤섞이듯 날렸다. 발아래로 아스팔트가 깔렸지만, 걷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마즈막재의 옛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충주(忠州). 가운데 중(中) 마음 심(心)의 충(忠), 이 땅은 예로부터 중원(中原)이라 불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9주 5소경을 정할 때 국토의 중앙에 중원경(中原京)을 두었으니 바로 이곳이다. 고구려 땅에는 북원경(원주)을, 백제 땅에는 서원경(청주)과 남원경을, 가야 땅에는 금관경(김해)을 두었다. 지금도 충주에 중원컨트리클럽이 있고 그 명물 파6홀이 있으니, 옛 중원경의 이름이 골프장에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셈이다. 지도 위에 손가락을 짚어보면 충주는 한반도의 허리 즈음에 걸린다. 옛사람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여겼던 까닭을 알 것 같다.


어찌 보면 중원의 충주 이 땅은 아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터지던 해, 신립(申砬) 장군은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맞섰다. 강을 등지고 싸우다 끝내 패하여 강물에 몸을 던졌다. 지금도 탄금대는 그 이름을 품고 남한강가에 서 있다.


오늘 우리가 향하는 곳은 청풍(淸風)이다. 남한강 물길을 따라 올라가는 그 길, 퇴계 선생도 1569년 음력 3월 12일 충청감사 유홍의 배웅을 받으며 동쪽으로 길을 잡아 청풍군을 찾아가셨다. 내일은 청풍구에서 다시 배를 타고 구담봉(龜潭峰) 아래 장회나루까지, 그리고 단양으로 이어진다. 모레는 드디어 죽령(竹嶺)이다.


충청감영에서 충주 시내를 통과한 뒤 산 등성이 오르막에 이를 즈음, 표지판에 '마즈막재 삼거리' 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누군가 새로 붙인 이름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려온 이름이 지금도 도로 표지판에 살아 있었다.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오를 때 마지막으로 넘던 고개였다. 그래서 마즈막재다.


퇴계 선생의 귀향길에서는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이 고개만 넘으면 마침내 영남이다. 도산(陶山)이 가까워진다. 마즈막재는 이별의 고개가 아니라, 귀향의 문턱이었다.


마즈막재에 힘찬 발자국을 남기고, 재현단은 청풍명월의 맛집 밥상위의 보야한첩 밥보로 향했다. 만개한 벚꽃 아래 시골밥상 한 상을 가득 받아 든 점심이었다. 몸도 마음도 든든해진 상태, 청풍을 향해 밥보 식당을 나서 버스에 오르려 이동하는데, 벚꽃잎 한 장이 사뿐히 내 왼손등에 내려앉았다. 그 수많은 꽃잎 중 어찌 나의 손등에. 순간, 그 꽃잎은 퇴계 선생께서 보내신 "어서 안전히 도산서원으로 오라" 는 천사의 편지인 줄 알았다.


그 물음의 답은, 청풍문화유산단지 한벽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청풍문화유산단지는 1983년 충주댐 건설 뒤 수몰 위기에 처한 청풍군의 관아 건물과 유적들을 옮겨놓은 곳으로, 제천시 청풍면에 있다. 2년 전 성균관 동양인문아카데미 김태환 회장, 성대 고재석 교수 등과 함께 탐방한 바 있어 낯설지 않다. 청풍명월 석비도, 수몰 지역에서 옮겨온 석불도 그동안 잘 있었는지 그리고 황금 두꺼비 바위 "황금색 입을 만지면 복을 받아 가신다"는 안내판 앞에서 나는 기꺼이 손을 내밀었던 적이 있었는데 얼른 쓰다듬어 주고 싶었던 그 마음, 어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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