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 귀향길 9일 차 3편, 청풍명월(淸風明月), 한벽루에서
버스가 청풍문화유산단지 앞에 섰다. 팔영루(八詠樓) 계단을 오르자 청풍명월 비석과 한벽루(寒碧樓)가 눈앞을 압도했다. 화려한 단청과 웅장한 누각의 한벽루는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이 왕사가 되어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퇴계 선생은 젊은 시절 공무 수행 중 저녁 무렵의 한가로운 풍경을 시로 표현했고, 류성룡 대감은 임진왜란의 비통함을 노래했다는 그런 유서 깊은 한벽루. 그 누각 위에서 대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맑고 가는 선율이 봄바람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각 위에서 대금을 부는 저 여인, 한 시간 전
밥보 앞 거리에서 내 손등에 사뿐히 내려앉았던 벚꽃 잎 한 장의 천사가 바로 저분이었구나 싶었다.
경내를 거닐다 한쪽 돌기둥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당당한 비문 청풍명월(淸風明月),
그리고 나의 머리는 밥보 식당 기둥에서 읽었던 함은숙 시인의 시문이 아롱거렸다.
비봉산 올라서면
구름도 쉬어가는
원곳이 그림 같은
한눈에 보는 비경
맘속에 묻어둔 고향 꿈...
사십여 년 전 충주댐이 들어서면서 청풍의 옛 마을과 길이 물속에 잠겼다. 구름도 쉬어가던 그 비경이 지금은 충주호 수면 아래 고요히 가라앉아 있다. 이 시는 찬미가 아니다. 수몰된 고향을 향한 애끊는 그리움이었다.
한벽루 앞 너른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안동 부시장과 제천시 공무원도 함께했다. 퇴계 선생의 출발지 안동과 오늘의 경유지 제천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안동 부시장은 환영사에서 3월 30일 퇴계 선생 귀향길 출발 이후 현재까지 재현단은 160킬로미터, 앞으로 110킬로미터. 충주댐으로 수몰된 옛길 때문에 걷기와 버스, 배를 번갈아 이용하며 나아가고 있고, 남양주에서 양평, 여주, 충주, 제천, 영주를 거쳐 마침내 도산서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축사로 전하셨다.
김병일 원장님이 한벽루 앞에 서셨다. 1569년, 퇴계 선생은 가흥까지 관선(官船)을 타고 오신 뒤 충주에서 말을 타고 이곳 청풍에 이르셨다. 당시 청풍군수 성암 이지번(李之蕃)은 퇴계 선생보다 7살 연하였다. 퇴계 선생이 도학을 권하였고 선조 즉위 후 퇴계 선생의 천거로 청풍군수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남달리 효심이 깊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천문과 지리에도 밝았다.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암을 만나 마음을 나누셨으니, 그 만남이 얼마나 각별했겠는가. 오늘 이 자리의 행사 제목이 "청풍에 온 그리운 사람"인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어 퇴계선생을 심도 있게 연구한 김경호 교수 특강이 진행되었다. 누정(樓亭)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경치를 즐기는 공간이 아니다. 당대 지식인들이 모여 쉬고 노는 유식(遊息)의 공간이자, 경전을 토론하고 학술을 논의하며 현실의 정치를 함께 논했던 인적 관계망의 아카이브였다. 충주댐으로 한벽루가 자리는 옮겨졌지만, 이 공간이 품고 있는 장소성(場所性)은 45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있다.
김 교수는 먼저 한벽루의 이름 속으로 들어가셨다. 寒(한), 냉철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긴박함. 碧(벽)
, 푸르다, 시퍼렇다. 대금 소리를 들으며 문득 누각 맞은편 아래를 내려다보니 충주호의 물빛이 온통 푸르렀다. 저게 碧이구나. 수몰된 고향 마을을 품고 저리도 푸르게 출렁이는 저 물빛이 바로 한벽루의 벽(碧)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은 이 퇴계 귀향길의 본질을 짚으셨다. 도학(道學)이란 의리와 수양만이 아니다. 우주 만물의 이치에 대한 철학적 성찰, 그 핵심이 바로 천리(天理)다. 앞으로 남은 110킬로미터, 한 발 한 발 걸으며 천리를 되뇌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도달하는 그 순간, 재현단 여러분 마음에 깃드는 것은 정성(誠) 일 것이라고.
시대는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강박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퇴계 선생이 평생 꿈꾼 것은 물러나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 귀향길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욕망을 정리하는 물러남의 모범이었다. 교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재현단의 14일 기간 물러났으면 아마 1400일 나아갈 힘이 생길 겁니다."
길을 걸으면서 그 가치와 의미를 생각해 보면, 뜻깊은 경험이 되지 않겠느냐고, 박수 소리가 한벽루를 울렸다. 봄볕 아래, 청풍명월의 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