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귀향길 10일차 4편, 금계(錦溪) 황준량, 일

by 윤석구

퇴계 귀향길 10일차 4편,

금계(錦溪) 황준량, 일찍 진 별



이어진 강의는 일찍 진 별,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으로 흘러들었다. 퇴계 선생과 깊은 연고가 있기 때문이다.


황준량과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두 사람은 1517년 동갑이다. 1540년 스물네 살에 문과에 급제한 것도 동방(同榜), 함께 합격한 동기다. 둘 다 퇴계 선생의 제자로 이름을 남겼다.


금계(錦溪)라는 지명은 금계포란(金鷄抱卵)에서 왔다. 황금빛 닭이 알을 품은 형국에서 비범한 인물이 난다는 뜻이다. 전국에는 십승지(十勝地)가 있다. 정감록에서 전쟁과 가뭄과 전염병을 피할 수 있는 열 곳의 땅을 꼽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풍기의 금계촌(金鷄村)이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에 있있다" 십승지 제1번지다. 예천의 금당실, 영월 등이 뒤를 잇는다. 소백산 서남쪽 기슭에 자리한 금계, 지금은 댐이 들어서 금양점사, 옥양 같은 옛 지명만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황준량은 단양 군수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위해 헌신했다. 단양 농민들의 삶이 너무 고달프다며 임금에게 십 년에 걸쳐 조세 감면 상소를 올렸다. 오천 자에 달하는 상소문이었다. 그것이 받아들여져 십 년간 세금이 면제되었다 하니,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이었다. 영천 신령에 백학서원을 세우고, 성주에 녹봉정사와 서당을 열어 후학을 길렀다.


퇴계 선생께서는 황준량의 명정(銘旌) 즉 관 위에 덮는 깃발 에 '금계황선생(錦溪黃先生)'이라 직접 써주셨다. 제자를 선생으로 칭한 것이다.


선생께서 임금과 아버지, 그리고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용암 이현보, 중재 김벌, 그리고 금계 황준량, 이 다섯 분을 위해서만 행장(行狀)을 쓰셨다는 사실이 그 무게를 말해준다.


1563년, 황준량은 마흔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다. 퇴계 선생은 제자를 위해 제문을 두 번 짓고, 묘갈(墓碣)도 두 번 썼다. 스승이 제자를 위해 그리한 것은 유일한 일이었다고 전한다.


열흘째 걷는 이 길, 우리가 지나는 풍기 땅 어딘가에 금계마을이 있다. 한 십 년만 더 살았다면 퇴계 문하 수제자가 되었을 인물, 일찍 진 별이었다. 버스 안 특강에 임하는 이한방 박사님의 눈가에도 일찍 진별에 아쉬움이 큰듯 목소리마저 차분한 느킴 손
문득 고향 생각이 났다.


오늘날 논산, 옛 지명 니산(尼山)의 앞산 계룡산(鷄龍山).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찾아 이곳을 답사했을 때 무학대사가 말했다. "이 산의 형국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다." 그 두 주체인 계(鷄)와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태조는 신도안에 수도 건설 공사까지 시작했으나 결국 한양으로 결정되었다. 선조들이 공부하셨던 그 땅, 십승지의 금계포란과 고향의 계룡산 금계포란이 같은 형국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십여년전 구룡대cc인가 계룡대cc인가 어느 코스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코스 한 가운데 표지판에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계룡산이라고 멋지게 안내도를 설치해놓았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2026.4.8. 나룻터에 다가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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