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학폭의 기억과 상담자의 자리에서

by 하린

한 아이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몸을 웅크린 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처음엔 조각조각 끊어졌던 말들이 점차 하나의 흐름을 이루기 시작했고, 나는 어느 순간 그 이야기를 듣는 내 심장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 아이는 학폭 피해자였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그래서 듣는 것이 힘들었고 분노와 연민이 얽혀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동시에 ‘나도 똑같은 고통을 겪었지’ 라는 기억이 천천히, 그러나 뚜렷이 되살아났다.

나는 상담자였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한 명의 생존자이기도 했다.


상담을 무사히 마치고 난 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 속에서 오래전 이름들이 떠올랐다. 내게 조롱을 던졌던 얼굴들, 책상 밑에 쪽지를 돌리며 날 희화화했던 웃음소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나치던 선생님들. 그 모든 기억이 어느새 다시 내 안에 자리를 틀고 있었다.


그 아이들 말이다. 지금은 잘 산다고 했다. 누군가는 시집을 가서 부를 누리고 있고, 누군가는 미국에서 국제변호사가 되었다고 한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잠깐 생각했다. 그들의 주변 사람들은 과거를 알까. 그들의 배우자, 아이들, 동료들은 그들이 어린 시절 한 사람을 짓밟고 웃던 존재였다는 걸 알까. 누군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우울을 심고, 삶의 방향을 왜곡시켰던 사람이라는 걸, 그들이 지금 ‘정의’를 말하며 살아간다는 게, 나에겐 너무 낯설었다.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 기억이 떠오른다고 해서 내가 미숙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성공에 흔들린다고 해서 내가 작은 사람도 아니다. 이 세상은 완벽히 공정하지 않으니까.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 입힌 기억조차 없이 살아가고, 상처받은 사람은 그날의 장면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나는 상담자로서, 그 현실을 매일 마주한다.


그러나 아이를 마주했을 때,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흔들렸지만, 버텼다.
그 아이 앞에서 나는 상담자로 존재했고, 그 존재를 지켜낸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나는 오늘도 내담자를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는 늘 누군가의 고통이며, 어쩌면 또 한 번 내 기억을 건드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기억은 내가 가진 약점이 아니라, 이 자리에 나를 앉힌 이유 중 하나라는 걸.


가끔은 말하고 싶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리고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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