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는 가장 강력한 기억입니다
오래된 골목, 족히 몇십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작은 건물이 있다. 드문드문 이끼 낀 기와 아래, 진 밤색 서까래와 흰 회벽을 주홍빛 능소화가 뒤덮었다. 이층 다락방 동그란 창문으로는 달빛이 쏟아지고, 일층의 어른 키만 한 큰 창은 저녁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창을 낸 밤색 문을 열면 황동으로 만든 자그마한 종이 은은한 인사를 건넨다.
간판도 안내문도 없는 낡은 골동품점을 들어서면, 티크 마룻바닥이 삐걱이며 조용한 공기를 흔든다. 벽을 따라 늘어선 진열장마다 투명한 유리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병마다 손 글씨로 쓴 이름표가 붙어 있다. 창으로 스며든 온기는 유리병에 부딪혀, 조각나며 순백의 벽 사이사이 흩어졌다. 빛의 파편은 때로 능소화의 그림자와 고여 있던 빗물에 맞닿아 물결처럼 일렁인다.
이름표로 눈을 돌리면, 정성스레 눌러쓴 글들이 보인다.
‘일천구백팔십팔년 시월 이십 이일. 결혼식에 가기 위해 화장을 하시던 엄마의 화장품 냄새. 토요일의 나른함, 약간의 설렘.
그 옆 병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천삼년 칠월 이십육일. 장마가 끝나고 맑게 갠 저녁. 피어오르던 물에 젖은 나무 냄새와 마침내 돌아온 햇빛이 뒤섞여, 두근거리는 여름 내음.’
또 다른 병에는 빛바랜 글씨로 짧게 쓰여 있다.
‘이천십이년 십이월 팔일.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 ‘틱틱’ 모닥불 타는 소리, 희미한 연기, 눈, 장작 냄새.
진열장 사이 기둥에 조그만 안내문이 보인다.
향기는 가장 강력한 기억입니다. 보잘것없는 풀 냄새부터 강렬한 피 냄새까지. 향기 골동품점에선 필요한 향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잊혀지고 그리웠던 향기를 되찾고 싶다면 이곳에서 다시 마주할 수 있습니다. 지우고 싶고, 흐려지고 싶은 향기가 있다면 이곳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이곳의 규칙은 단 하나입니다. 원하는 향기를 고르면, 그 향기는 이제 당신의 것이 됩니다. 대가는 당신의 향기를 하나 내어놓아야 합니다. 되돌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놓아야 할 기억도 있겠죠. 망각은 결국, 신이 내린 축복이니까요.
천천히 둘러보다. 눈길은 한 병에 멈췄다. 손바닥만 한 유리병 속에는 분홍색의 안개 같은 것이 떠다니고 있다. 이름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천오년 사월 십일. 낮 동안의 포근함이 조금씩 옅어지는 어스름한 저녁,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벚꽃들. 낙화. 그때 울리는 너에게 온 문자. 공기 속에 뒤섞인 서늘함과 꽃향기. 멀리서 들려오는 잔잔한 웃음소리.’
그 병을 집어 한참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글씨체지만, 왠지 손끝에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주머니에 조심스레 담았다. 책상 위, 비어 있는 투명한 병 옆으로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팬을 들고 서서히 적어 나간다.
‘이천칠년 삼월 십오일. 너무 빨리 피어 버린 목련이 떨어진 거리. 봄비에 젖은 골목길. 꽃샘추위에 불던 바람. 장미, 바닐라, 머스크 향이 어지럽게 섞인 향수. 내게서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
뚜껑을 닫고, 이름표를 붙인 순간, 이상한 기시감이 스쳤다. 주머니 속 병을 꺼내들자, 거기에도 똑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향기를 남겨두고 있었던 걸까. 남겨진 건 향기였을까, 아니면 내가 놓아버린 기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