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희망. 잊고 싶은 바보 같은 짓. 잊혀지지 않는 모든 것들
낭만은 죽었다. 시인은 굶어 죽고, 연극은 관객 수에 갇히며, 소설은 판매 부수로 재단되고, 노래하는 이는 순위표 안에서만 숨을 쉰다. 그림은 값표가 붙은 순간 침묵한다. 꿈은 가루처럼 흩어졌다. 삶의 아픔, 아름다움, 슬픔,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더 이상.
자본주의 세상에서 낭만은 죽었다. 돈, 성공, 명예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다면 실패한 인생이라 낙인찍고, 자기 계발서의 몰락의 원인으로 규명한다.
‘유명한 실패 사례로 그는 터무니없는 이상향을 꿈꾸며, 비효율적인 시간 관리와 소모적인 행동으로, 경제적이지 못한 결정을 거듭 내려 결국엔 부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계발서를 읽어야 할 시간에 시를 읽고 삶을 찬미했습니다. 숫자를 등한시하고, 연극을 보며 가슴이 뛰었습니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들을 분석하지 않고, 소설을 읽으며 인간을 탐구하였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채, 노래 안에서 사랑과 이별을 배우고, 그림을 보며 심미적 감각을 키웠습니다.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습니다. 당신은 낙오자입니다.’
“낭만의 노예들이여 경제적 자유를 얻으라”
다들 부자가 되라고 울부짖는다. 나도 낭만을 잃어간다. 부자가 되고 싶다. 경제적 자유는 21세기의 새로운 해방 운동이다.
성과가 없는 행동들은 질타 받는다. 어리석은 이의 허무맹랑한 외침 속 낭만은 장례식을 치른다. 초라한 추도사를 읊조린다.
“고인이 생전 좋아하던 시 ‘귀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 말하리라.’ 고인의 소풍을 기억합니다.
휴가로 떠난 강에서 쏟아지는 은하수의 별빛.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하며, 만들었던 나만의 앨범.
다리가 부러지고도 뛰어갔던 너의 집 앞.
소주, 포장마차, 그리고 겨울 바다.
벚꽃 휘날리던 고백. 퍼붓는 장대비를 맞으며 기다렸던 첫사랑.
첫 키스,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 같던 세상의 모든 노래.
또 소주.
혼자 떠났던 기차 여행. 옷도 갈아입지 않고, 강에 몸을 던졌던 여름.
어른이 된 것 같았던 첫 직장.
멍청한 친구들과 보냈던 무의미한 시간.
불가능한 희망.
잊고 싶은 바보 같은 짓.
잊혀지는 모든 것들."
서툴고, 부족하지만 뜨거웠다. 감상적이지만 진실했고,
이상적이지만 꿈을 향해 달려갔다.
날카로운 성찰도, 눈부신 업적도 없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나날이 모두 낭만이었다. 서툴고, 부족하지만 뜨거웠다. 감상적이지만 진실했고, 이상적이지만 꿈을 향해 달려갔다. 현실의 비석 앞, 묻혀 있던 추억들이 피어오르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떠올랐다.
돗자리를 펼쳐놓고, 엉킨 이어폰 줄을 귀에 꽂고, 익숙한 멜로디를 듣는다. 얼굴에 모자를 눌러쓰고 나른한 낮잠을 청한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들의 향기. 풋내 사이로 바람이 불면 노트를 꺼내 아무 말이나 끄적인다. 하늘을 바라본다. 짙은 푸르름 사이로 부유하는 구름들. 살결에 느껴지는 햇살의 온기. 찰나의 순간. 죽어 있던 낭만이 깨어났다. 아직 소풍 중이다. 돌아가기엔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