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도 심장이나 폐처럼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면 좋겠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by Rian

어젯밤, 달빛은 평온했지만 작은방은 요동쳤다. 별 보다 많은 걱정과 불안이 침대 머리맡으로 쏟아진다. 천근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초침 소리를 귓속에 쑤셔 넣는다. 억지로 끌어내린 눈꺼풀 뒤로 별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파도친다. 15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자 랩을 하다 들었던 옆방의 비웃음 소리, 35살 각종 고지서 앞에 통장 잔고. 장면은 쉴 틈 없이 전환되며 생각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몰려든다.


번민은 밤의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을 곱씹다, 되새김질하다, 뱉어냈다 다시 삼켰다를 반복한다.

밤의 혼란이 거짓말처럼, 아침만 되면 머리가 텅텅이다. 아무런 생각의 잔해조차 남아있지 않다. 영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눈만 껌뻑인다. 어떠한 해결책을 주지 않고 괴롭히기만 하는 뇌는 이럴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의 장기인데도 불구하고 돕지 않는다. 분명 이성적으로 판단하라고 했을 텐데 욕망에 약하고, 감정에 휘둘리다 중요할 때는 텅텅이다. 텅텅이 뇌, 이응이응 뇌 같으니.


별것 아닌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도 매번 울고, 지난주 화요일 점심 메뉴도 기억 못 하면서, 20년 전에 했던 실수들은 선명히 떠올린다. 매일 밤 기억의 책장에서 한 권씩 뽑아 펼쳐도 밤새 읊어 댈 텐데, 이젠 책장을 엎어 버린다. 널브러진 과거는 현재를 침범하고, 미래를 잠식한다.


IMG_5248 copy.jpg


가끔 머리를 갈라 뇌를 꺼내 세탁기에 돌리는 상상을 한다. 라벤더 향의 세제를 한 숟갈 넣고, 거뭇한 망상들이 하수구로 씻겨 나간다. 아무 생각 없이 흥얼거리다. 멜로디가 나오면, 볕 좋은 한구석에 탁탁 털어 걸어 놓는다. 보드라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뽀얗고, 햇살 냄새 배인 기분 좋은 뇌를 다시 집어넣는다. 눈도 코도 마음까지 보송보송해진다.


또는 뇌도 심장이나 폐처럼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며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면 좋겠다. 조금만 뛰어도 온몸에 피가 돌듯 문제를 해결한다. 아니 그냥 숨만 쉬어도 가장 좋은 방법을 턱 하고 내놓는 것이다. 위가 음식물을 소화시키듯 온갖 공부거리를 삼켜 기억하고, 무조건 반사처럼 가장 최악의 기억들은 쳐내 버린다. 학습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외부 자극을 차단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밤 10시면 되면 차단기가 내려가고, 스스로 하나씩 꺼진다. 추억을 가장한 상처는 거즈로 감싸고, 사소한 오류들은 내면의 동요 없이 가나다순으로 알아서 정리한다. 상념으로 펼쳐진 그림들은 모두 양, 하늘, 숲, 바다로 대체한다. 귓속으로는 바람, 새들의 지저귐, 파도 소리가 스며든다.


고요가 뇌의 가장 깊은 틈새까지 차오르며, 어지럽던 잡념들을 조금씩 밀어낸다. 적막이 자리 잡자,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식은 밤의 것이다.

수요일 연재
이전 05화나는 콜라 중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