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미워해도 사랑해도 괜찮아!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버스를 타고 높은 피레네산맥을 넘어가는 동안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경사와 굴곡이 심한 길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어지러웠고 물기를 머금은 나무들이 비안개 속에 보일 듯 말 듯 사라졌다 나타나는 풍경이 몽환적이었다. 연초록 잎새들은 아기의 볼처럼 탱탱하고 싱그러웠다. 버스 소리에 놀란 듯 산천이 파르르 떨었다. 산봉우리와 푸른 잎 사이사이를 안개가 바람에 밀려가는 모습이 내가 마치 신선이 되어 구름 위를 떠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어제저녁 몸 상태가 안 좋은 데다 아침 식사를 제대로 못 한 탓인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온몸에 맥이 빠지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얼핏 잠이 든 것도 같았다.
대관령 길을 방불케 하는 피레네산맥을 넘어 드디어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인 생장에 도착했다. 정신을 차리고 우비를 꺼내 입었다. 산티아고 여정의 실제적인 출발지인 생장피에드 포르( Saint-Jean- Pied-de-Port)는 프랑스 시골에 있는 작은 마을임에도 깔끔하고 세련된 도시였다. 빨강 지붕에 흰색 벽돌로 지어진 집들이 몇 채씩 푸른 초원 위에 옹기종기 모여서 산뜻하면서도 정겨웠다.
산티아고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이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 등록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다소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갔다. 뒤집어쓴 우비와 배낭 등 부자유한 상태여서인지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다. 순례자 사무실에 가까워질수록 다양한 국적과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른 여행지에서와 차이점은 사람들이 차분하고 다소 진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순례자 사무실에 도착해서 순서를 기다렸다. 입구에는 산티아고 길에 대한 그림이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네 사람이 등록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두 명씩 들어오라고 해서 일을 처리해 주었고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은 먼저 순례자 등록을 하고 푸르덴셜이라는 여행 기록지와 조가비를 주었고 우리는 4유로를 냈다. 푸르덴셜은 앞으로 가는 곳마다 도장이나 사인을 받아서 여행 과정을 확인하는 용도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조가비는 순례자라는 표시로 배낭에 매달았다. 앞으로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여행자, 순례자라는 표시로 나와 함께할 조가비를 바라보며 이곳을 거쳐 갔을 여행자들을 생각해 봤다. 어떤 표식을 단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그 표식 하나로 정체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드디어 여행자가 되었다. 설렘도 두려움도 아닌 모호한 상태의 여행자….
등록을 마친 우리는 근처에 있는 피에드포드 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성을 돌아 올라가는 길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돌로 쌓아 올린 성벽에는 긴 세월의 흔적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성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무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넓은 공터를 지나 유선형 길을 따라 내려오는 언덕에는 오래된 거목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높은 성벽 밖 넓은 공터에는 개망초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 조롱조롱 귀엽고 앙증맞았다. 얼마 큼의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를 돌벽에는 하얗게 돌꽃이 피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얀 검버섯 같은 무늬들이 염치없이 번져가고 있었다. 축축한 물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발을 딛고 기어오르는 덩이 식물들이 빽빽하게 그 앙칼진 뿌리로 달라붙어 돌담의 자취가 지워지고 있었다. 그런 덩이 식물을 볼 때마다 참 가증스럽기도 하다. 약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타인의 영혼까지 빨아먹고야 마는 인간군상을 보는 것 같아 그 잔인함이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말갛게 눈을 뜨고 기어오르는 푸른 잎새들은 마치 미소 지으며 상대를 소리 없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를 보는 듯했다.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선 이 푸른 잎새들은 언젠가 모든 것들을 산산이 부숴버릴 것이다. 악마의 얼굴이다. 보이는 것과 묻혀있는 것 사이에는 어두운 비밀들로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뒤엉킨 채 살아간다.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 성곽에는 드러난 모습보다 묻혀있는 진실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긴 세월 역사의 순간마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생장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생장에 우뚝 솟은 피에드포드 성은 주변 국가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전쟁터이기도 하다. 이곳을 차지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렸기 때문이다. 생장은 찬란한 문화유산과 음식, 축제, 수려한 경관들로 여행객들을 매혹했다.
또한 생장 피에드포드는 산티아고 프랑스 로드(Road)의 출발지로서 여행객들에게 다양한 정보와 물자를 제공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빠진 여행용품을 준비하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긴 여정의 길을 점검하기도 한다. 생장의 피에드포드 성은 긴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독특한 자취와 위용을 지닌 채 산티아고 여정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맞음과 배웅을 함께 해주어 깊은 여운이 남았다.
피에드포드 성과 마을 사이를 흐르는 니베 강은 언제부터인지도 모른 체 많은 사연을 안고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강 주변과 아치형 다리에서 사람들은 강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여행의 한때를 음미한다. 아치형 다리는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잘 어우러져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도시를 완성시켰다.
얼마큼 달려왔던가!
여행이나 순례를 하는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이유와 목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이곳까지 왔을까? 떠밀리듯 엉겁결에 길을 떠났고 지금도 무슨 큰 의미나 가치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까닭도 없다. 그저 무심으로 들길에 부는 바람이기도 하고 피어올랐다 사라져 가는 안개이기도 했으면 좋겠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니베 강가 아치형 다리난간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물은 쉬지도 않고 어딘가로 흘러간다. 삶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살면서 누구나 사람들은 드러난 삶과 묻혀있는 삶 사이에서 마음속에 있는 두 개의 얼굴들이 서로 다른 타인들처럼 모른 척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날엔 깊숙한 영혼의 골짜기에 묻혀있던 얼굴이 숨죽여 울먹이는 것을 마주한다. 피에드포드 성에서 흘러간 세월의 흔적들을 보면서 난 깊은 곳에 묻혀있던 내가 꿈틀거리며 솟아 나오려 몸부림치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 울어도 돼. 괜찮아 이제 밖으로 나와도 돼. 미워해도 사랑해도 괜찮아, 괜찮아!”
나에게 속삭여줬다. 그리고 산티아고 여정에서 찾아야 할 의미를 알게 된 듯하다. 드러난 나의 삶을 위해 묻혀있어야만 했던 나의 영혼들이 훌훌 날개를 달고 넓은 평원 속을 나는 것을 보고 싶다. 어쩌면 이번 여정은 진정한 나를 찾고 내 존재의 ‘의미’를 찾아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노을에 잠기는 성은 어둠 속으로 묻혀 갔지만, 내 안의 성벽은 오히려 무너지고 있었다. 드러난 나와 묻힌 내가 이제 같은 얼굴로 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