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빈 지게를 받아지고
3. 넷째 아들의 숙명
장남이 아니었는데도 조부모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사셨던 까닭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세월이 흘렀을 때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상처하셨다.
다른 마을에 홀로 된 할머니를 보쌈하여 새 장가를 드셨다.
그 할머니는 아들 셋을 낳았고 아버지는 그중 둘째였다.
첫째 할머니께서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고 가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형 셋, 누나 하나, 남동생 이렇게 여섯 남매였다.
두 번째 할머니가 낳은 아들 중 아버지는 둘째였고
아버지 바로 위의 형이 엄마 말씀에 의하면 그렇게 잘나고 똑똑한 분이셨다고 한다.
집안의 희망이었던 큰 아버지께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발을 돌려 빨치산이 되셨다.
순창 적성 빨치산 총대장으로 활동하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때문에 넷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부모님을 모시면서 장남 역할을 하셔야 했다.
아버지의 숙명이었다.
아버지는 형님의 유족인 형수와 조카를 돌보셨야만 했다.
시골 양반 가문에 재산이 좀 있다고는 하지만 장가 안 간 동생과
열한 명의 대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 짐의 무게는 측량하기에 어려웠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홀로 된 큰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두고 재가와 합가를 반복하셨다고 한다.
재가에 실패한 큰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데리고 분가하셨다.
아버지는 재산의 대부분을 형수와 조카에게 넘겨주셨다며 어머니는 서운해하셨다.
동족상쟁의 비극 6.25 전쟁을 치르면서
국민은 모두 가슴이 헌 천 쪼가리들처럼 헤어지고 뭉그러진 상처로 아파했다.
못 먹어서 흘릴 피도 없이 마른 울음들을 울어가며 그 시대를 버티고 살아내셨다.
농사를 지어도 공출로 거의 다 내보야했다.
그러고 나면 간신히 겨울을 날 정도의 식량만이 남고 빈털터리가 되곤 했다.
당시 농촌 실상이었다.
보리가 나오기 전에 식량이 떨어지는 것이 다반사였고,
나무뿌리를 캐어 연명하기 일쑤였다.
그런 와중에 산업화의 물결을 맞이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도(移都) 향촌(鄕村) 행렬에 끼어 서울로 서울로 보따리를 싸 들고 상경하였다.
아버지도 형수와 조카를 내보내고 가족들을 데리고 그 대열에 합류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터를 잡은 우리 가족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 얻어 온 병마로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았다.
4. 종갓집 맏손녀의 운명
어머니는 손이 귀한 종갓집 맏손녀로 태어나셨다.
문중의 지극한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사셨던 어머니가
낯선 서울이라는 곳에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지셨다.
그런 어머니를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며 아버지는 나날이 피폐해지셨다.
국가 유공자 훈장을 찾기 위해 외삼촌과 함께 애쓰셨지만 살아생전에 찾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 아버지 ”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가족들의 외침을 알아들으셨는지 어쨌는지
아버지는 나를 보며 손을 내미셨다.
내가 교사로 발령받던 날 아버지는 생기를 띠며 삶의 의지가 살아나신 듯했다.
“옛날 같으면 장원급제한 것이나 같은 것이야.” 하시며
“우리 딸 혼자 조용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좋은 방을 따로 마련해 줘야겠다.” 어깨를 펴시며 기뻐하셨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한양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지병이 악화한 아버지는 더 이상 소생할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사시는 동안 내내 병원과 집을 오가며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셨다.
마지막 순간에는 링거 꽂은 팔이 부어있었고 더 이상 어떤 의료적 처치도 소용이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와 맞이한 아버지의 임종.
마지막 숨을 어렵게 몰아쉬시더니 희미한 의식이 사라지셨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시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이 자식들을 나 혼자 어쩌라고 이렇게 간단 말이요? ○○아버지 ○○아버지~~~”
긴 병마와 싸우는 동안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아버지를 보살피셨던
엄마의 절규에 가까운 통곡도 이승을 떠나는 아버지를 붙잡지 못했다.
그날 담벼락에 서서 내려다보이는
중앙대학교 부속 여자 중고등학교 울타리에
흐드러지게 피어 빛나던 노란 개나리꽃이
어째 저리도 눈이 부실까? 생각하며 야속하다 참 야속하다며 홀로 눈물을 흘렸다.
해마다 노란 개나리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4월이 되면
아버지의 마지막 숨소리와 나를 향해 내밀던 손과
엄마의 통곡 소리가 어우러져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맞이하곤 한다.
6. 꽃비 날리는 섬진강 길
교사로 발령받은 순간부터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는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다.
자랑스러운 우리 딸 보고 또 봐도 다시 보고 싶어 안달이 나는 딸이었다.
그런 나를 두고 차마 떠나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셨다.
그 시절엔 의료보험이 없어서 병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웠었다.
떡 하니 딸 덕분에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첫 월급을 타온
딸이 대견하고 기특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기뻐하셨다.
그런 딸 덕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셨다.
발령받은 지 한 달 만에 한 많은 삶을 접고
허적허적 길 떠나신 아버지에 대한 회한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가슴에 못이 되었다.
아버지가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떠나신 후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담벼락에 붙어 서서 담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힘없이 어깨를 내리뜨린 채 서성이던 모습이다.
어쩔 땐 목소리를 가다듬고 시조창을 하시며 마음을 달래시기도 하셨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나를 지게에 지고 강을 건너며 부르시던 그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세월이 무심히 잘도 흘러갔다.
아버지께서 애타게 찾고 싶어 했던 국가 유공자 훈장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나는.
그런데 동생이 계속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했었던 듯하다.
어느 해 봄날
나는 광양에서 섬진강을 따라 고향 순창으로 차를 몰았다.
4월 거리에는 곳마다 하얀 벚꽃이 소복한 여인네의
고운 속적삼 같은 슬픔을 안고 깃털처럼 허공에 날렸다.
눈이 부시다 못해 아린 청초한 하늘과
물기를 머금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파릇한 새싹들의 아우성에 귀가 먹먹했다.
'이제 이 길을 마지막 가는구나' 생각하니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일이 되면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꽃비 날리는 섬진강을 따라 남원을 넘어 순창으로 가곤 했었다.
그럼 어디선가 어린 딸을 지게에 지고 목청껏 시조창을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저만큼에서 어른거리는 듯했다.
6. 아버지의 빈 지게
“아버지 국가 유공자 훈장 찾았어. 누나~~”
두어 해 전쯤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살아 계실 적에 아버지와 외삼촌은 국가 유공자 훈장을 찾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끝내 찾지 못하고 아버지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며 이승을 떠나셨다.
평생 원하는 것 한번 제대로 해주지 못한 처자식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안은 채……
“어떻게 찾았는데?”
“아버지 이름으로는 찾을 수가 없어서 할아버지 이름으로 하니까 찾을 수가 있었어.
집에서 부르던 이름과 호적상 이름이 달랐데.
군(軍) 적(籍)에 집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찾을 수가 없었던 거야”
허망했다.
이 단순한 착오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삼십여 년이 지난 뒤에야 국가 유공자 훈장을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과연 국가는 국가 유공자들을 예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국가가 찾으려는 의지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찾아서 보상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화랑 무공훈장’ 그것이 아버지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청춘을 바치고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은 것에 대한 대가였다.
참 허탈했다.
살아생전에 그것을 찾을 수 있었다면 아버지는 좀 더 사셨을지도 모른다.
그 무거운 삶의 짐이 조금은 가벼웠을 수도 있었다.
남원 고개를 넘어 순창에 다다랐다.
내일이면 선산을 떠나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자리를 옮겨 모실 예정이다.
정든 고향을 다시 또 떠나시는 것을 아버지는 어찌 생각하실지.
고향을 떠나는 아버지, 섬진강 길의 아득한 추억을 뒤로하고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을 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다.
사랑하는 어린 딸을 지게에 지고 강을 건너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조창을 구성지게 부르시던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면서 평생을 사셨던 엄마의 주름진 얼굴이 눈물로 얼룩지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항상 아버지가 가엾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우시며 평생토록 지워진 무거운 지게를 등에 지고 사셨다.
삶의 짐을 대신 지느라 초췌해진 아내와 아직 자라지 못한 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가실 때 아버지의 가장으로서의 서글픈 심정이 다시금 설움으로 차올랐다.
태어난 순간부터 누구나 자신의 짐을 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누구의 지게에 더 많은 짐이 지워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쩜 짐이라는 것은 자신이 느끼기 나름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나를 지게에 지고 강을 건너셨을 때 아빠는 시조창을 하시며 즐거워하셨다.
내가 져야 할 짐을 기꺼이 지게에 지고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하지만 그 짐을 지고 가지 못할 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형벌이다.
넷째 아들로 태어나 집안의 모든 짐을 져야 했던 아버지,
해방 전후에 태어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받쳤던 젊음,
그리고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으로서 삶의 무게,
세상을 떠나면서도 벗지 못한 지게를 이제 벗어버리고 훨훨 편안한 모습으로 가셨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벗어 놓으신 빈 지게를 받아 짐을 가득 지고 한평생을 살았던 또 한 사람이 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묘비 앞을 이제는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지팡이를 짚고 걷고 있다. 부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내 지게에 짐을 지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희망으로 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