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밑에 선 봉선화 같은 울 언니

부제: 큰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by 이슬

<빚만 떠안기고 떠난 남편>


“ 말해 이제 모두 끝났다고.

날 잊고 행복하게 살라고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난 그렇게 소리쳤다.


“ 언니! 우리 집으로 가자.

우리 집에 가서 당분간 함께 지내자”

힘없이 따라나서던 언니는 다시 돌아서며,

“ 아니야, 집에 가봐야겠어” 하며

중국에서 온 이제는 남이 된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눈에 빤히 진실이 보이는데도

언니는 외로운 촛불처럼 흔들렸다.

남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제2 IMF라고 했던 때에 형부는 사업을 확장하다

부도가 나서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둘째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떠났다.


빚을 청산하기 위해 서류상 이혼을 했고

언니는 빚더미와 함께 두 아들을 떠안았다.

이제 중학생이 된 막내아들과

급하게 결혼시킨 의대 다니던 아들 부부까지.

김병종의 화홍산수


집에서 살림만 했던 언니에겐 날벼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언니의 명의로 융자받아 형부는 회사를 운영했다

명목상 부사장이었던 언니가

채무를 떠안아야 한다는 것을 남편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경제적인 활동도 할 수 없게 된 최악의 상황이었다.

놀랍게도 언니는 웬만한 전문 경영인도

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여 모든 빚을 청산하였다.


아들 그리고 며느리도


형부는 떠나기 전에

의대 3학년이던 아들을 급하게 결혼시켰다.

아마도 회사 경영이 어려워질 것 같으니까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이 선택은 어려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렸고

언니를 두고두고 괴롭히는 또 하나의 악재가 되었다.


만약 아들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언니와 함께 집안일을 정리하며

의대도 졸업하고 힘을 길러 집안을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혼한 며느리는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언니에겐 짐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다.

며느리 친정에서는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카가 전문의를 따지도 않았는데 며느리는 임신했고 쌍둥이를 낳았다.


언니는 기가 막혔다.

아들 부부의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막내아들 교육은 온전히 언니의 책임이었다.

쌍둥이를 낳은 며느리는

친정엄마에게 아기를 맡겨 놓고 학습지를 한다고 돌아다녔다.

아들에게 장모까지 얹히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중국으로 간 형부는 사업을 새로 시작하겠다며

언니에게 서류를 떼어 달라고 했다.

언니는 서울에 돌아와서 같이 살자며 서류를 떼어 주지 않았다.


그런데 며느리가 언니 몰래 형부에게 서류를 해줌으로써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됐고,

결국 형부의 외도와 재혼이 언니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렇게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형부가 재혼했다는 사실을 언니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보고

언니는 기가 막힌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혼인 신고가 되어있었다.


아빠를 따라간 둘째 아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엄마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아들에 대한 배신감에 언니는 더 큰 좌절과 분노에 휩싸였다.


하지만 싸움도 곁에 있어야 할 수 있는 것

머나먼 중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싸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언니

그 언니의 절망과 고통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유주희의 작(2024)

“ 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밥을 하려고 하면 커다란 가마솥 안으로 빠질 것 같았어.

그리고 뜨거운 여름날 밭에서 김을 맬 땐

발이 뜨거워서 호미로 흙을 판 뒤 발을 디디면서 풀을 뽑았어.”


언니는 간혹 가다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푸념하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밑으로

내리 네 명이나 된 동생들을 그 어린 등에 업어 키웠다.


언니의 회한 가득한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살림 밑천이라던 큰딸로 태어난 언니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엄마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했다고 한다.


“ 난 책이 뭔지, 공부가 뭔지도 몰랐어.

학교 갔다 오면 책 보따리 팽개쳐 놓고 일하기에 바빴어.

아랫마을 순덕이가 교복을 입고

책가방 들고 중학교에 가는 모습이 얼마나 부럽던지.”


나보다 네 살이 많은 언니는

중학교 진학을 못한 체 집안일을 했다.

당시에는 여자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남자들도 진학률이 그렇게 흔하지 않던 시대였다.


2018 P. Pisan작 기도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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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덕이 언니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어서

내가 보기에도 항상 뽀얀 피부에 차분한 모습이 부러웠다.

흰 카라에 검정 치마인 교복 입은 여학생은

아랫마을 윗마을에서 오직 순덕이 언니뿐이었다.

농삿 일을 거들던 언니의 눈에

얼마나 부러웠을까? 생각하면 가여움에 목이 메곤 한다.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가을걷이가 끝난 어느 날

공출을 마치고 난 뒤 우리 오 남매를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추수가 끝나도 언제나 빈손이었던 부모님은

또 다른 삶의 방편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먼저 서울 가서 살고 있는 친척 말을 듣고

서울살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오 남매가 부모님 없이 한 달가량을 살았던 것 같다.

언니는 오롯이 우리들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다.

당시 내가 4학년이었으니까 학교에 다녔다면 중학교 2학년 정도의 나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 아빠는 소식이 없었다.

엄마 아빠를 기다리던 그 한 달은 너무나 길고 길었다.

해 질 녘이면 나는 사립문을 열고 나가서

멀리 신작로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곤 했다.


혹시 엄마가 오시나 싶어서

고샅길이 어둠에 묻힐 때까지.

그때부터 나는

그리움이 무엇인지 기다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서울로 떠나신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실제보다 부모님의 부재를 더 길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밥을 짓던 언니가

쌀 항아리에서 쌀을 푸며 쌀이 다 떨어져 간다고 걱정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슬프고 두려웠다.

한의원을 하셨던 작은할아버지를 찾아가서

그 사실을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언니는 부끄럽게 왜 그런 말을 했느냐고 했지만,

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정이 다가오는 어느 날

부모님께서 선물을 가득 안고 돌아오셨다.

엄마는 늘씬하고 키가 컸으며 보기 드물게

고운 엄마는 하얀 무명 한복을 입으셨다.

엄마의 그 모습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부모님은 밝은 표정이었고

나름 서울 생활에 자신이 있는 듯이 여겨지기도 했다.

명절을 지내고 우린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고향을 떠나오던 날 마을 길을 돌아

커다란 저수지가 있는 아래 모산을 지났다.

마을 앞 체계산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산 위에 코발트 빛 푸른 하늘이

우리를 잊지 않겠다며 맑은 눈빛으로 배웅해 주었다.


플라타너스가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길에

어쩌다 먼지를 풀풀 날리며 지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저 버스를 타면 어디로 갈까? 궁금했는데

그 버스를 타고 원다리를 건너서 우린 미지의 세계 서울로 길을 떠났다.


원다리 밑은 섬진강 상류로

눈부시게 하얀 모래밭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다.

4월 초파일이면 흰옷을 입은 마을 아낙네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구성진 진도 아리랑을 부르고 또 부르며 한을 풀어내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상처의 흔적


특히 엄마의 진도 아리랑은 그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창이었다.

엄마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어린 맘에 왜 그렇게 서럽게 느껴졌던지 모른다.


서울살이 하다 힘이 들고 지친 날엔

엄마는 그 진도 아리랑을 울먹이듯 흥얼거리셨고

그 모습이 내 가슴에 설움이 되어 맺혔다.

설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밑에 선 봉선화 후속 편은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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