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밑에 선 봉선화 같은 울 언니

부제: 21세기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진정한 힘

by 이슬


호롱불을 켜던 시골 생활을 접고 기차를 타고 올라오던 길에

처음으로 본 가로등이 무엇인지 참 궁금했다.

상도동 산동네에 자리를 잡은 우리 집은 방이 여덟은 되는 큰 집이었다.


우리는 방 두 칸을 썼고 나머지는 모두 세를 주었다.

서울로 온 우리들은 모두 전학했다.

오빠는 중학교, 나와 동생들은 초등학교,

언니는 노량진에 있는 과자 싸는 공장에 다니게 되었다.

복사꽃

노량진 과자 공장에서 밤새 일을 하고 돌아오는 언니가

학교 가는 우리들을 만나면 몰래 숨겨 나온 과자를 우리들 손에 쥐어 주고는 했다.

땅콩 캐러멜! 나는 지금도 그 땅콩 캐러멜을 좋아한다.

땅콩 캐러멜만 보면 거친 삶 속에서도

복사꽃처럼 곱게 피어나던 언니의 모습이 겹치곤 했다.


밤을 새우며 노동에 시달리던 언니가

몰래 숨겨서 가져온 과자를

동생들에게 건너 주었던 그 일이

그때는 얼마나 슬픈 일인지 난 몰랐다.


땅콩 캐러멜


그 후 부모님들은 언니를 시외전화국에 교환원으로 취직을 시키셨다.

시골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만들어서.

당시에는 서울 시외전화국이 여자 직장으로 괜찮은 곳이었다.


언니는 목소리가 맑고 고왔고

한눈에 봐도 청순하고 예뻤다.

시외전화국에서 새롭게 시작된 언니의 직장생활은

나름대로 보수도 좋은 편이고 환경도 좋았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까지

언니는 시외전화국에서 교환원을 했다.


큰 직장으로 옮기니 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당시 직장 생활하면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료들을 보고

언니는 학교에 보내 달라고 부모님께 요구했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언니의 요구를 무시했다.


어느 날 언니는 파란색 책가방을 사 들고 왔다.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부모님은 그 가방을 빼앗아서 내게 주셨다.


“ 너는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잘 다니다 시집가면 된다.”


나는 철없이 새 책가방이 생겨서 좋았다.

언니의 피눈물이 담긴 가방인지도 모르고.

언니는 배움에 대한 꿈이 좌절된 채 이십 대 초반까지 교환원을 했다.


1970~1980년대 여학생 가방(네이버)

그곳에서 언니는 형부를 만났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형부는 언니의 목소리에 반했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언니를 찾아내

싫다고 하는 언니를 쫓아다니며 괴롭혔다고 한다.


그래서 부서를 옮기기도 했지만,

형부는 귀신같이 알고 언니를 찾아내고는 했다.

시대가 바뀌고 조국 근대화의 물결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면서

자동 전화로 전화기가 교체되었다.



시외전화국을 거쳐야만

통화가 가능했던 시대는 끝나고 있었다.

그 많은 교환원의 장래가 불안해졌다.

가짜 졸업장을 만들어

취직한 언니는 신변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사회 경험이 부족한 언니는

발각될 때의 상황을 감수할 힘이 없었다.


형부는 군대에 다녀와서까지

언니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고 한다.

교환원 시험을 봐서 대기업에 취업하겠다는

다부진 꿈을 안고 언니는 그 좋은 시외전화국을 박차고 나왔다.


부모님과 상의도 없이.

그리고 언니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해 교환원국가자격시험에는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고 만 언니는 낙담하고 절망했다.

그렇게 1~2년을 헤매다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형부와 결혼하게 되었다.



70-80년대 시외 전화국 교환원들(네이버)


알고 보니 형부는 홀어머니의

배다른 동생이 여섯이나 있는 집 장남으로

형부만이 오직 본처 자식이었다.

시어머니는 친모가 아니었고 시아버지는 세상을 뜬 상황이었다.


형부는 그 집에서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월급은 봉투째 시어머니

손에 들어갔고 언니는 돈 한 푼 만져 볼 수 없었다.

그곳에서 일 년간 죽도록 시집살이했고 언니는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네이버 블로그 2022.5.23. 월급봉투

한국통신 기지국에서 근무하게 된 형부는

원주로 발령을 받았다

언니는 다행히 시댁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형부는 사업 능력이 남달랐다.

한국통신을 나와

재취업 위탁 교육을 시작했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승승장구하며 사업을 확장했는데

제2의 IMF를 맞이하면서

자금 회전이 되지 않아 부도를 맞게 되었다.


어느 겨울인가 잠이 깬 새벽

난 문득 혼자 쓸쓸한 집에 남겨져

어둠 속에 창밖을 바라보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 모서리가 조금씩 부서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곤 했다.


언니가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 보면 아리고 쓰리다.

언니는 자기가 어린 손으로

반 부모 역할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언니는 월급을 타면 봉투째 부모님께 가져다 드렸고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모든 가족들이


어느 해 겨울 초입 때 혜화동에서

가족들과 함께 연극을 보다

남편과 의견 갈등으로 다투고 무작정 택시를 타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받고는 추운 겨울날

맨발로 전철역까지 뛰어나와

그 어두운 밤에 나를 기다리던 언니,

우리 딸 대학 졸업한다고

축하 잔치를 해주던 그날이 바로 그날이다.


형부에게 소리쳤던 날,

차라리 끝이라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게

그렇게 말하라고 소리쳤던 날이……


언니는 칠십이 조금 넘은 나이를 살고 있다.

아들들도 모두 성공했다.

큰아들은 의사로 대전에서 개원했다.

중국으로 간 둘째는

아빠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막내는 예술가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70년대 공장에서 일하던 모습(네이버)

중국 여자와 살던 형부는

서울로 그 여자와 함께 돌아왔다.

한국 국적만 딸 수 있게 해 주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다시 언니와 재결합했지만,

둘 사이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만 확인한 채

다시 한번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한번 잃어버린 사랑과 신뢰는 결코 되찾을 수 없다.


언니는 큰 아들이 있는 대전에서 혼자 살다

지금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모든 이들에게 정성과 사랑을 받쳤건만

모두에게 버림받은 언니,

큰딸이라는 이유로 꿈을 버려야만 했던 언니,

그 언니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들 모두는 어려운 시기를 건널 수 있었다.


분명 가장 큰 덕은 부모님이 보았다.

특히 엄마 그런데 엄마는 큰딸에게 야박했다.

언니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바친 것은 엄마였는데

그 엄마가 절망에 빠진 언니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동생들도 자기 살기 급급해서 외면했었다.

다 장성한 자식들은

엄마의 그늘이 되어주기는커녕 원망뿐이다.


그 험한 시간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엄마의 모습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아들들은 모두 아빠 편이다.


천경자의 미인도

울 밑에 수줍게 피어있는 봉선화꽃을 보면 우리 언니 같다.

붉은 울음을 머금고 있는 울 언니,

설움의 시간 속에 피어서도 힘없이 서러운 꽃,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울 언니’ 그 언니의 쓸쓸한 뒷모습이 저만큼 서 있다.


그 시대를 희생과 헌신으로 살아냈던

연약하지만 강한 우리의 언니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진정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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