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유리 구두 한 짝

부제: 나의 꿈과 삶의 여정은 계속된다.

by 이슬

정년 후 서울로 올라온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았다.

‘드디어 해방이다. 해방이구나.’ 신나고 즐거웠고

한편으로는 남편에게 앙갚음한 것 같은 마음에 통쾌하기도 했다.


남편을 따라 어쩔 수 없이 지방으로 내려간 지 삼십여 년 긴 시간 동안

경북 포항, 경남 진교, 전남 광양 등 지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시댁과 친정도 모두 서울인데 나만 남편을 따라 이 지방 저 지방을 떠돌았다.


한풀이하듯 시작한 정년 후 서울 생활은 마치 개선장군 같았다.

첫해엔 해보고 싶었던 이화여대 시니어 모델 최고위 과정에 입문해서

몸의 바른 자세를 배웠다.


20171008_172312[1].jpg 파비오 칼 베티

연대 최고위 과정, 고대 최고위 과정 등을 통해

21세기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함께 살아갈 벗을 만나기도 했다.


맘껏 가보고 싶은 전시회, 갤러리 및 각종 세미나와 포럼 등

나날이 변해가는 세상의 코드를 읽고 알게 된 미지의 영역들을 접하고,

새로운 일들을 찾아다니며 역동적인 시간을 보냈다.

마치 솜사탕을 든 어린 소녀가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입성한 느낌이었다.



“언니! 이더리움이 대박이야!”

“그래! 그렇긴 하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가상화폐가 대세가 될 테니까?”

“맞아! 언니, 언니도 잘 알고 있구나!”

“근데 나는 할 줄도 모르고 돈도 없어서 투자하기 어려울 것 같아!”


서울 생활하면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높은 소득을 보장한다면서 이더리움에 투자를 권했다.

매일매일 여기서 나온 코인으로 생활하며

자기 친구들은 몇억씩 벌고 있다면서 꼬드겼다.


정년하고 나니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투자하지 마라.

특히 가상화폐, 코인 같은 것은 절대 안 된다.” 모두 신신당부했다.


특히 아들, 딸이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곤 했다.

하지만 지인의 요구는 지속됐다.

할 줄을 모른다.

계좌 만드는 것도 못 하고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계속 거절했다.


그럼 대신해 주겠다며

내 핸드폰을 가지고 계좌를 만들고 지갑을 만들고 하였다.

두 눈을 뻔히 뜨고 내 정보를 알려주면서 이들의 꿰임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녀는 서울에 오기 전부터 남편모임에서 알았기 때문에 믿었다.

시니어 패션모델도 하고, 골프 마니아에다

하루하루의 삶을 다이내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꿈꾸는 삶을 사는 것 느낌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비서처럼 부리는 이를 불러다가 일을 시키곤 했다.

비서 같은 그녀는 자신이 교육자 집안 딸이라고 했다.


그녀는 입안의 혀처럼 내게 잘했다.

내가 아프다고 했더니 배달앱으로 음식을 배달시켜 주었다.

나를 데리고 온갖 곳을 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다.

그녀는 테헤란로에서 많은 정체불명의 사람들과의 미팅에 나를 대동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들 대부분은 코인이나 이더리움 등 가상화폐에 투자를 유도하거나

다단계를 하는 일명 사기꾼들이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코엑스에서 개최하는 메타버스 설명회에 참석했다.

수많은 사람이 전국에서 몰려들었고 그 광경을 보고

‘아! 메타버스까지 책에서만 봤는데 실제로 실행이 되고 있구나!’

경이로웠고 한편 이런 세상을 접한다는 것 자체에 자존감이 높아졌다.


이 설명회는 서울에서 4대 권역, 4대 지방을 순회하며 개최한다고 했다.

처음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던 나도

이처럼 대대적으로 설명회를 기획해서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괜찮은 것인가 보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유리구두를 신고 무도회에 초대받은 신데렐라처럼 신기하고 가슴이 설렜다.



한 번은 언주역 부분에서 하는 설명회에 참석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놀란 것은 참석하신 분들이 60~70대 노령층이었고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다단계 생수 판매업을 하는 여자 대표가

이 일에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금과 수익금을 모두 이 왓콘에 투자한다고 했다.

불길한 냄새가 났다.

고령층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찜찜했다.


그 설명회에 참석한 뒤 난 산티아고 여정에 올랐다.

두 달이라는 긴 기간 동안. 그리고 돌아왔다.

이더리움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예전엔 연락도 자주 하고 먼저 전화하고 했던 그녀는

통화도 어렵고 만나는 것은 더 힘들었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왓콘 대표가 사기로 검찰에 구속됐다는 기사가 떴다.

불안은 현실이 됐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나를 이 판에 끌어들인 여자에게 물어봤지만,

기다려 보라고 자기도 잘 모른다면 발뺌하기 급급했다.

나를 수렁에 빠트린 대가로 수익을 챙겼으면서 자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얼굴을 바꿨다.


20171008_172225[1].jpg 파비오 칼베티 작


아들, 딸이 “사기는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지나치게 높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노동임금이 아닌 불로소득은 모두 그 뒤 배경에 악이 숨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아들, 딸이 너무 고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결국 아들, 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남편도 항상 말했다.

“당신은 철부지 어린애 같아.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

꼭 우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아서 맘을 놓을 수가 없어”라며 타박하곤 했다.

아이들이나 남편이나 내가 미덥지 못하다는 말이 사실이 되었다.


정년 후 3년 고개를 넘고 있다.

나의 생활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세상 무서운 지도 사람이 무섭다는 것도 모르고 지냈던 3년 동안

아주 많은 체험을 했다.

현실사회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보았다.


정년퇴직자들을 사기꾼들이 노린다는 말을 듣고도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일도 없다고.

그런데 그들은 너무나 가까이 있었고,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달콤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사기꾼에게 당해서 내 재산을 잃고 자존심도 잃어버렸다.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어린 소녀의 손에 든 솜사탕은 모두 녹아 버렸고

빛나던 눈망울엔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화려했던 무도회는 끝났고

유리구두 한 짝을 잃어버린 신데렐라처럼 절뚝거리며 현실로 돌아오고 있다.

20190402_135418[1].jpg 구례 화엄사 사월 초파일 등 축제

앞으로도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21세기 사람들의 나이는

자기 나이 곱하기 0.7이라 했다.

아직 젊고 나의 꿈과 삶의 여정은 계속된다.


잃어버린 유리구두 한 짝을 들고 찾아올 미래의 행운을 준비하며

오늘은 또 다른 세계로 로켓을 쏘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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