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발자국 소리

부제: 내일의 신세계

by 이슬

이른 시간 아침 운동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골목길을 돌아서자 한 젊은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그 젊은이는 키가 185cm 정도로 균형이 잡힌 멋진 젊은이였다.


밤새 내린 비가 4월 새벽 우윳빛에 싸여있는 신비한 길을,

앞서 걷고 있는 그의 뒤를 따라, 한참 걸었다.

젊은이는 전철역으로 들어섰고 나는 천변을 따라 걸었다.


길을 걸으면서 힘없이 축 처진 젊은이의 뒷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길섶에 불쑥 자란 청보리에 그렁그렁 이슬이 맺혀있는 모습을 보면서

힘없이 걷는 젊은이의 등허리로 흘러내리던 착잡함이 내게로 전해져 왔다.


천변은 새벽인데도 많은 이들이 걷고 뛰고 사이클을 타기도 했다.

비안개가 어린 길을 마치 난타를 치듯 두들겼다.


이 시간대는 젊은이의 모습보다 60~70대 이상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몰골에서 고령화의 짙은 그늘이 느껴졌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삶에 급급하여 살아온 흔적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허름한 자전거를 끌고 나와서 아무렇게나 걸친 옷을 바람에 날리며 지나간다.


허리가 휘고 다리를 절며 걷는 노인들도 있다.

남산만 한 배를 내밀고 뚱기적 뚱기적 걷는 이도 있다.

칠십이 넘은 듯한 여인은 짝 달라붙은 레깅스를 입고

가슴을 덜렁거리면서 뛰어가기도 한다.


헝클어진 머리와 허름한 옷차림을 한

뼈만 앙상한 나이 든 여인네가

개에 끌려가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게 느껴졌다.

월드컵 천변의 다양한 군상들을 보면서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서히 젊음을 잃고 무너져가는 자신을 대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은 깊은 자기 성찰의 길이다.


이 새벽에 산책길을 나서는 것이

긴 밤 숙면하지 못하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어쩜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싶어서

부실한 몸을 움직이며 천변을 걷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누구인가?

전쟁의 폐허 위에 태어나 배고픔을 견디며 자랐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 산업화의 역군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초석에 세운 이들이다.

자신 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했고,

자신 보다 부모 형제, 자식들을 우해 희생하며 살아온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나이 먹고 늙어 가고 있다. 늘어난 평균 수명!

아직 살아계신 부모님과 아직 독립하지 못한 자녀들 사이에서

갈 곳을 잃어버린 이들이다.


20250603_080117[1].heic 월드컵 천변 청보리와 꽃 양귀비

준비 없이 맞이한 고령화 시대는 많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고속 성장 한 결과,

다른 나라들보다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 중이어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세대 간의 갈등이다.

고령화로 젊은 세대의 짐이 무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을 거쳐 6.25 전쟁을 치러내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개혁을 발판으로

무섭게 성장한 대한민국은 세계사에 위대한 신화를 남겼다.


세계 경제 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OECD 회원국이 되었으니 기쁘기도 하지만

샴페인을 빨리 터뜨렸다는 일부 우려도 타당한 면이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심각한 포퓰리즘(Populism)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 정착은 선심성 정책의 남발로 국가의 부채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가는 곳마다 축제, 가는 곳마다 무상이 판치는 세상이다.


축제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 터트리는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이들은 황홀경에 넋을 잃는다.

산산이 흩어지는 불꽃들은 한순간 찬란하게 어둠 속을 유희하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사라져 간다.


지금 우리나라가 바로 불꽃놀이 축제가 끝난 뒤

어둠 속으로 침몰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진정 우린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은 고령화와 깊이 맞물려 있다.

세대 간 갈등은 점점 깊어지고 있으며,

더 이상 노인은 후세대의 멘토가 될 수 없고

후세대는 노인들의 그늘에 가려서 성장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천변 청보리의 새순이 자라고 꽃양귀비 줄기가 비를 맞으며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봄을 불러왔다.

이름 모를 새들의 경쾌한 지저귐이 박자를 맞춰준다.


나무들도 새잎을 틔워 올리며 풋풋한 향기를 뿌려주고 있다.

축복과 희망으로 가득 찬 이 새벽 길가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 이들의 모습에 겹쳐,

청보리 새순 같은 젊은이의 고뇌에 찬, 뒷모습이 내내 눈에 밟혔다.

새벽에 일터에 나가는 젊은이가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등허리를 타고 내리는 힘없는 젊은이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천변을 걷는 또 다른 이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그 젊은이의 모습에 겹쳐다.

이 시대의 무거운 짐을 지고 새벽 출근길을 묵묵히 나서는

젊은이에게 내 나라의 앞과 뒤가 보였다.

20250423_133310[1].heic 월드컵 공원 분수

새벽 천변을 걷는 발걸음 소리에 꽃양귀비 뺨이 붉다.

청보리 새순마다 바람이 인다.

물속에 제 그림자 비추며 섰는 흰 해오라기는

천변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눈을 뜨고 날개를 펴며 날아오른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대는

그것이 진리였다.

지금 고령화의 그늘이 짙어오지만

젊은이의 늠름한 모습과 살아온 지혜로 녹아있는 어른 세대가

함께 발맞춰 나간 면 내일의 신 세계를 열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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