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배웅
부제: 사랑보다 진한, 정보다도 깊은 연민
그녀는 새벽 어스름에 길을 나서는 이를
창가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정원엔 목련이 하얀 봉오리를 새의 부리처럼 내밀고
오는 봄을 맞이하고 있다.
차에 올라탄 이는 창가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서 있는
아내를 힐끗 한번 바라보며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짧은 아파트 단지를 지나
골목 어귀를 돌아서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새벽 공기가 그녀를 감싸 안고
가시처럼 품으로 파고들었다.
4월 초 봄바람은 대지의 숨결을 뽑아 올리는 순간
얼어버린 채 바늘처럼 폐부를 찔렀다.
그녀는 뭔가 모를 것이 휘~이~잉하고
빠져나가는 것 같은 허탈함과 둘 곳 없는 마음이 신기루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가 송도로 발령을 받고 떠난 지 5~6년이 흘렀다.
내년이면 돌아온다고 한해, 또 한해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셋째 아들도 서울로 떠났고
오직 그녀만이 이곳 주택단지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녀만이 이곳에 남아 있었던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남편이 승진해서
다시 이곳으로 발령을 받을 것이란 예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주말은 그녀가 서울로 상경을 하든지
남편이 광양으로 오든지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왔다 가는 경우 보다
그녀가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많았다.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은 언제나 설렜다.
하지만 돌아올 땐 소박맞은 새색시처럼 마음이 허해지곤 했다.
어쩌다 터미널까지 배웅해 주는
남편이나 딸이 버스 밖에서 손을 흔드는 것을 바라볼 때마다
허락하지도 않는 눈물이 눈가에 번지곤 했다.
차가 고속도로를 달려
광양읍을 지나 성황동 고개 길을 돌아서
중마 동으로 들어설 때면
그녀는 문득 ‘아! 왜 나는 가족들을 서울에 두고
저물어 가는 시간 홀로 이 낯선 곳으로 돌아와야만 하는가!’하는
의문에 휩싸이곤 했다.
오늘 보다 내일, 지금보다 훗날을 기약하는 삶이
대나무처럼 속이 텅 빈 듯하여
실바람에도 소리를 내며 허허롭게 울었다.
그들은 결혼한 후 일 년 반 정도를 함께 살았다.
짧은 신혼이 지났고 남편은 포항으로 발령을 받았다.
육 개월 된 딸을 양육하며
직장을 다니며 남편이 부재한 시간들을 살아냈다.
패기 충천한 남편은 희망과 의욕에 불타올랐고
매일 손 편지를 보내며 혼자 있는 아내를 위로하려 애썼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 준다면 꼭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남편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에
속고 또 속으며 전쟁 같은 나날을 보냈다.
딸을 출산한 후 몸이 쇠약해졌다.
결핵성 늑막염으로 수저들 힘도 없던 그녀였다.
산휴기간을 지내면서 회복이 되긴 했지만
그 체력으로 직장 다니며 아이를 키운다는 일이 버겁기만 했다.
토요일에 아내와 딸이 있는 집으로 왔다,
일요일 저녁이면 다시 포항으로 떠나는
생활의 반복은 그들의 몸도 마음도 지치게 했다.
남편의 적극적인 요구와 친정 엄마가,
남편 옆에서 살아야 한다며,
그녀의 등을 떠밀어 포항으로 갔다.
포항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 남편은
광양으로 발령을 받았고
또다시 광양, 포항 간 오고 감을 반복했다.
언제나 배웅을 하는 건 그녀였다.
재회의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 지나고
다음 날 해거름에 집을 나서는 남편을,
아기를 안고 배웅하는 일은, 매번 적응하기 어려웠다.
남편도 처자식을 두고 떠나면서
자꾸 뒤돌아보며 손 흔들며
걸음을 재촉하는 맘이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오랜 기간 장거리 결혼 생활이 끝나고
드디어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서울, 경북포항, 경남 하동,
그리고 광양으로 직장을 옮기며
온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 노력했다.
십여 년 동안 광양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기간이 그들에겐 인생의 꽃 같은 시절이었다.
남편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했다. 마음 조이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는 남다른 능력과 리더십을 기반으로
직장에서 자기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녀도 직장에서 나름 커리어를 쌓아가며 성장했다.
아이들도 잘 자라서 둘째까지 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남편이 부장을 거쳐 상무로 승진하면서
다시 인천 송도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남편은 또다시 서울 광양을 오가는 생활을 해야 했다.
아들이 함께 있을 때는 남편도 그녀도 오가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내마저 서울로 입성하자
홀로 남겨진 그녀는 자유롭기보다
허전했고 때때로 외로웠다.
어쩜 팔자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견우와 직녀처럼
신의 노여움을 사서 함께 살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또다시 그들은 주말 부부가 되었고
아내는 서울로 남편은 광양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어느 날 문득 그는 아내가 홀로 차에 올라타는 것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이 애잔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작고 여린 그녀가 기차에 오를 때는
플랫폼에서 기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버스를 타고 갈 때는 그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망연히 서 있곤 했다.
그녀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면,
눈물이 흐를까 봐 애써 외면하며 차에 올랐고,
플랫폼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찾는 남편을 스치고 떠나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남편은 아내가 서울 올라왔다
내려가는 길에 동행하기 시작했다.
일요일 저녁 아내와 함께 내려왔다,
월요일 새벽 올라가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을 들판에 피어나는 갈대처럼
세월을 묻혀가는 아내가 한없이 측은했다.
그녀는 스무 살 피어나는 목련처럼 수줍고 고은 꿈으로
그를 만나 6남매 장남인 남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반세기 가까운 여정을 함께 했다.
신의 장난이었는지 시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함께 했던 시간보다 동거와 별거 사이에서
보내고 맞이하며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다.
거친 남편이었던 그와 여린 아내였던 그녀의 동행은
슬프기도 하고 때론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잘 살아냈다. 참 장하다’ 스스로 격려해 준다.
그는 퇴직을 했고 그녀 곁으로 왔다.
이제 누구도 그들을 떼어 놓지 않았다.
그녀도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물러났다.
남편은 아내 곁에 머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꿈이 달랐다.
남편은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꿈이 있다고 했고
아내도 못다 한 꿈이 있다고 했다.
남편은 남편의 꿈을 위해 그의 길을 갔고
아내는 아내의 꿈을 위해 그녀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또 서울과 광양 사이를 오가며 산다.
부부로 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일은
어쩜 수행하는 수도자처럼 고도의 자기 성찰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인 것 같다.
부부라는 것은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유일한 사람,
존재 자체로 귀하고 소중한 이들이다.
비안개가 자욱한 창밖을 바라본다.
언제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을까?
그녀의 눈가에 세월의 흐름만큼 주름살이 얹혀 있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웅하고 앞모습을 바라보며 맞이하며 인연의 끈을 이어왔다.
이제 인생의 끝자락이다.
두 손을 맞잡고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듯 살아낸
서로를
사랑보다 진한, 정보다도 깊은, 연민으로
끓어 안는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그는 그녀를 따뜻한 품에 안아 배웅해 주리라 믿는다.
그녀도 한 오라기 미련도 없이 살다가는
그를 ‘참 잘했다. 장하다’ 손뼉 치며 보내줄 것이다.
하얀 목련 꽃이 지더니
무성한 푸른 잎이 뜰 안에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새 봄이 오면
목련은 또다시 뽀얀 솜털에 이슬을 묻치며
수줍게 햇살에 볼을 붉히리라.
한 세상이 가고 나면 또 다른 한 세상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