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떠나보낸다

부제: 낯선 내일의 자신을 찾아

by 이슬

한동안 망설였다.

의식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은 그날부터.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서성이는 내 마음은 겨울 들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았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

'아! 여기 있었네. 이제야 만났구나!'

어린 소녀처럼 설렜고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두 눈이 반짝였다.


그의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넓고 포용적인 느낌이 날 매혹시켰다.

첫눈에 반한 나와 그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후 우리의 만남은 깊은 애착으로 발전하였고,

그가 없는 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가 필요할 때 난 그에게로 달려갔고

그런 날 그는 아빠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맞아 주었다.

기쁨으로 충만한 어떤 날에

그는,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를 안고 있는, 기슭 같았다.


외롭고 슬픈 날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날 품에 꼭 안고

“ 괜찮아!, 괜찮아!”

다독이곤 했다.


어디를 가든지 나는 그와 함께했다.

처음 그와 함께 출근했을 때 사람들의 선망에 찬 시선과

숨겨진 질투가 얼굴을 따갑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와 부럽다!"

그런 수군거림을 들으면서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후 나는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그와 함께 어딘가로 훌쩍 떠났다.

아이들이 모두 서울로 진학했고, 남편도 서울로 이동하면서

나는 지방에 홀로 남겨졌다.


공휴일이나 주말, 혼자 있을 때면,

그와 함께 섬진강을 자주 찾곤 했다.

섬진강은 굽이굽이 수려한 물길이 매우 아름다운 풍광으로

찾는 이들을 매혹한다.

봄이면 봄이어서 가을이면 가을이어서 애틋하다.

매화 향이 3월 섬진강 변에 첫길을 트면,

뒤이어 산수유가 지천으로 피어올라 허공은 온통 꽃향기다.

시샘 난 벚꽃이 시도 때도 없이 여기 벙긋 저기 방긋 터지는 4월이면

산천은 자지러질 듯한 환희로 넘친다.

거기다 쨍한 햇볕이 꽃향기로 쏟아지는 봄날

섬진강 길을 달리다, 쉬다, 달리다, 쉬면서

' 아!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할….'

문득 코끝이 찡해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부임하던 날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그와 함께 교문을 들어섰다.

교직원들이 플래카드를 붙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히 첫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 나올 때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함께 간 그가 날 당당하게 해 주었고 든든한 경호원 역할을 해주었다.


40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마지막 교문을 돌아서 나올 때 갑자기 훅 터진 울음을

그는 고요하게 바라보며 따뜻한 품에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눈물이 반인 나의 순간들을 그와 함께했고 깊이 그를 의지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로 난 그와의 이별을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딸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다.

웬만하면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딸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던 중 신호위반으로 사고를 냈다.

한남대교 남단에서 잠원로로 진입해야 하는데

압구정로로 들어서서 유턴하여 달려가다 교차로 신호등에 걸렸다.

녹색불이 노란불로 바뀌었고

멈춰야 할지 달려야 할지 어정쩡한 상태에서

망설이다 그만 왼쪽에서 직진하던 차와 충돌하고 말았다.


"쾅"하고 들이 박치는 찰나 아! 죽는 건가?

한순간 멍했고 옆구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차 안에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차가 폭발하면 어떻게 하지?’

위기감을 느껴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상대편 차에 있던 운전자도 허리를 구부리고

다리를 절며 나왔다.

다행히 사람들은 경미한 부상에 그쳤다.

사고 현장을 점검하고 차를 옆으로 빼려고

시동을 걸었지만 걸리지 않았다.


보험회사와 연락하고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을 거쳤다.

웬일인지 좀처럼 견인 차가 오지 않아

유난히 추운 날씨에 한참을 덜덜 떨며 서 있었다.

보기에 딱했는지 조사하러 오신 경찰관님께서 경찰차에 타고 있으라고 하셨다.

견인차가 와서 망가지고 부서진

를 싣고 떠나는 것을 보고 자리를 떠났다.



그는 끝까지 나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다.

자신은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고쳐서 쓸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보험회사에서는 전손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폐차하라는 것이다.


하루, 이틀 시간은 흘러갔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론을 내릴 수 없어 망설이고 망설였다.

일주일여가 지난 후 짐을 수습하러 차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는 넓은 폐차장 한 귀퉁이에 버려져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삶의 여정에서 한쪽으로 밀려나는

나의 모습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운전석에 앉아 차 안을 둘러보았다.

에어백이 터져 빨래처럼 너덜너덜 펼쳐져 있었고

왼쪽 문짝은 안쪽으로 푹 들어와 있었다.

가운데 기둥마저 손상된 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켜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운전대를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예쁘게 보내주지 못해서, 이렇게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

“고마웠어! 그동안 함께 해줘서 많이 감사해. 네가 떠나더라도 널 꼭 기억할게.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한동안 흐느꼈다.

돌아와서 서류를 작성해서 보낼 때도

문득문득 순간순간 눈물이 핑 돌다 스러지고 핑 돌다 스러지곤 했다.


그는 외로운 시기 내게 남편이었고 아들, 딸이었으며 연인이기도 했다.


물건은 사용하는 이의 영혼을 닮는다고 한다.

나의 영혼을 담고 나를 닮았을 그를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내가 보내지 못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내 삶의 편린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폐차장에 버려진 그처럼

나의 슬프기도 기쁘기도 했던 여정의 한 자락을

이렇게 마감하는 것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를 떠나보낸다.

그와 함께했던 나의 날들도 함께 보낸다.

나의 영혼을 닮았을 그를,

되돌아갈 수 없는 내 삶의 순간들과 함께.

‘안녕! 소중한 내 친구! 내 아름다운 삶의 나날들이여!’


그를 보내며 내 삶의 한 페이지도 넘긴다.

나도 그도 낯선 내일의 자신을 찾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