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거나 동거하거나
부제: 황혼이혼, 황혼 연애?
‘초원의 빛’이라는 영화는
60년대 젊은이들에게 사랑과 이별의 슬픔을 느끼게 해 준 명화다.
버드를 영원히 떠나보내면서 디니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를 중얼거렸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로
첫사랑 버드를 보내고 돌아서는 디니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은 차라리 진리였으면 좋겠다.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더해질 때
사랑의 간절함이나 그리움도 깊어지며,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듯하다.
애틋한 첫사랑의 기억 저편에
문득 청초한 새순 같은 얼굴 하나가
윤슬처럼 반짝이며 부서질 때 그리움으로 가슴이 저린 날이 있다.
초저녁 바람 부는 길가에 서거나
붉은 노을이 울음을 토해내는 눈 시린 날에,
하얀 눈이 창밖에 내려 쌓인 새벽, 잠이 깨는 순간이 그렇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그러하였다.
대부분은 홀로 가슴에 품고 말 한마디 못 하고
그저 흘려보내며 지나왔다.
하얀 셔츠에 검정 치마 교복을 입고 행여 속옷이라도 보일까 두려워하며
옷매무새를 고쳐 잡고는 수줍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나가는 남학생을 바라보지도 못했고
흰 얼굴의 군인 집 오빠도 그저 먼발치에서 훔쳐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가슴앓이하는 시간이 삶의 알곡들을 견실하게
채워갈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첫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 수 있는 것은 어쩜 축복인지 모른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영화는
일상에 매몰되어 가던 중년들에게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영화다.
불씨만 남아 잦아든 아궁이에
송진 가득한 장작을 던져 활활 타오르게 하는 도발이다.
사랑이란, 부부란 어떤 것인가? 가족 안에서 나는 무엇인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깊은 성찰에 직면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은 그것 자체가 신의 창조적 영역이다.
진정한 사랑은 생물학적 반응이 동반되는 육체적·심리적 몰입이다.
우리 대부분은 첫사랑에 가슴 설레던 시기를 지나
청년으로 꿈을 이뤘다.
결혼하여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살았다.
부모로서 최선을, 사회의 주역으로 역할을 다했다.
그렇게 인생 전반전은 끝났다.
부부로 한 세상을 살았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사랑해서 삶을 살아간 것은 아니다.
더러는 부모 뜻을 따라 더러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살았다.
남편과 아내가 되어 사회가 만들어 준 틀에 맞춰
자식 낳아 기르며 사는 것을 삶이라 여겼다.
아이들이 떠나간 자리에 부부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두 사람은
그동안 사회적 역할로 분주했고 아이들 뒤치다꺼리로
서로에 다소 무관심한 채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달랑 두 사람만이 남겨진 상황에서
부부라는 관계는 나머지 삶의 질을 좌우하는
절박한 화두가 되었다.
공유하는 시간이 적었을 때는
마주치지 않아도 될 문제들에 맞닥뜨리면서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되곤 한다.
사는 동안에 쌓였던 서로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래서 서로를 얽어매었던 끈들을 풀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떠나고자 하는
욕망이 황혼이혼, 황혼 연애로 길을 트고 있다.
예전엔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아내들이 이혼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제는 남편들이 이혼을 신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가장으로 아내로 살아냈던 시간을 뒤로하고
비로소 한 인간으로 다시 돌아서고 있다.
‘초원의 빛’의 버드와 디니의 사랑은 풋사과 같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은 햇볕에 잘 영근 붉은 사과 같다.
그들은 모두 이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슴이 아리도록 절절했지만,
버드와 디니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헤어졌고,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았기에 이별할 수 있었다.
두 작품의 주인공들이 감동과 슬픔을 주는 것은
이별했기 때문이다.
‘초원의 빛’의 풋사과 같은 첫사랑이거나,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붉은 사과 같은 중년의 사랑이거나를 불문하고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설렘과 바람으로
신천지 같은 신비한 삶의 지평을 마주하게 한다.
진달래가 지천으로 흐드러지던 뒷산에 뻐꾸기가 울어대던,
열여덟 봄날에 저 홀로 복숭앗빛으로 물들던 두 뺨을,
푸른 잎 하나 떠가는 시냇물에 바래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랑의 계절을 그리워함이
비단 쏟아지는 달빛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이별이 미학이 된 시대에
황혼기 부부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남겨진 여백의 삶을 타성이 아닌
조금은 색다른 느낌으로 채워가고 싶은 것이
중년 이후 부부들의 소박한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습관이 되어버린
무미건조한 일상에 지쳐
부부이면서 타인보다 더 낯선 서로가 되어가는
슬픈 진실에 마주한다.
그들은 더러 이별하고 더러 이방인처럼 동거한다.
문득 이제는 빛도 열도 잦아든 채 천지를 떠돌다
헛껍데기만 남은 남편이 모노드라마의 한 컷처럼
저만큼 거실에서 서성인다.
조금 떨어진 방 한 귀퉁이에서
또 다른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서성이는 내가 있다.
백세시대를 맞이하는 나의 삶이,
사랑과 이별의 슬픔을 넘어 따뜻한 위안과 평화로
채워지기를 기원한다.
각각의 무대에서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이별하거나 이방인처럼 동거하는 것이 아닌,
한 무대에서 이중창을 하며 삶을 관조하길 바라는 것은
너무나 진부한 결말일까?
어쩌면 너무나 진부한 이 소망이,
생의 끝자락을 채워가는 목화솜처럼 따뜻한 동행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