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된 고요

부제: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

by 이슬


아침에 차 한잔을 마신다.

포트에서 달달 소리를 내며 차 끓는 소리가 정겹다.

잎이 져 버린 나뭇가지가 보이는 창가에

하얀 김이 하늘하늘 춤을 추며 허공 중으로 날아오르는 모습도 운치 있다.


날개를 훔친 이의 아내로 한 생을 살다,

어느 날 문득 알게 된 남편의 참모습에 놀란 선녀의 한탄처럼 흐느끼듯 물이 끓는다.


숫한 날들의 번뇌와 고뇌 속에

눈물범벅 된 얼굴로 두 아이를 품에 안고 하늘로 승천하는

선녀의 옷자락처럼 승화한 물방울들이 가냘픈 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초겨울의 쌀쌀함과 처연함이 스며드는 아침 시간,

찻물은 처음엔 작은 속삭임처럼 낮게 읊조리듯이 끓는다.

마치 긴 다리로 느리게 한발 한발 내딛으며

사색에 잠긴 학이 거니는 모습이다.


갑자기 바뀐 환경 속에서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내면을 울리는 잔잔하고 고요한 소리 같기도 하다.

찻물 끓는 소리는 유모레스크의 선율처럼 경쾌한 듯 하지만

속 깊은 애수가 서려 있다.

신천지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마주한

불안한 암호들을 발견하며 내뱉은 신음처럼 은밀한 슬픔과 외로움이 담겨있다.

하얗게 모습을 바꾼 투명한 물 입자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포트 속에 끓는 물은 처음엔 고요하게 하느적이다,

제 설움에 겨워 마치 한 세계를 파괴할 것처럼

리듬도 가락도 잃고 혼돈의 카오스가 된다.

그동안 맺혔던 고통을 항변하듯 맹렬하게 들끓는다.

그것은 마치 전장에 선 잔다르크 같다.


미친 듯한 격정 뒤에 실컷 소리쳐 울고 난 뒤의

적막 같은 흐느낌이 멈추고 나면 끓어오르던 열기는 조금씩 가라앉는다.

긴 여정에 지친 다리를 멈추고,

지나왔던 기억의 한 자리를 되돌아보는 여진의 순간이다.

이제는 잔잔해진 뜨거운 물을 하얀 찻잔에 따른다.

자리를 옮겨 앉은 찻물을 담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안는다.

찻물이 끓으면서 피어나는 하얀 아지랑이의 몸짓은 한 편의 팬터마임이다.


투명한 물방울들이 내 찻잔에 오기까지

이처럼 드라마틱한 과정을 지나왔다는 사실이 감동이다.

찻잔의 차는 향기를 내며 간간히 하얀 김을 피워 올리기도 한다.

그 차 한잔의 고요가 깊은 사념의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에릭 프롬은 자유롭기를 원하면서도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모순성을 지적했다.

집단은 권력을 형성하고 권력의 유지를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그들의 불안, 갈등, 실패 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투사한다.


인간은 누구나 희생양이 되기도 하고 희생양을 만들기도 한다.

미시적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희생양 메커니즘은

매우 사소하고 지속적이며 말초적으로 이루어져서

드러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거나 묻혀버리기도 한다.


한 개인의 개인사로 치부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끓는 물이 뚜껑을 들썩거리며 새로운 세계로 가고자 하는 몸짓들은

집단 속에서 고통당하는 누군가에게는 무언의 메시지를 준다.


사랑과 존중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가정에서조차 희생양이 있다.

희생양메커니즘(scapegoat theory)이란 개념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르네 지라르에 의하여 정립됐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가장 안전한 집단이다.

사랑과 보호를 기반으로 구성된 가정에서도

희생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가족 중 가장 약한 대상이 희생양이 되며,

가족의 묵인하에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이는 가족 내 권력의 불균형에서 오며

구성원들이 힘을 가진 자와 연합하여 갈등과 불안 해소의 대상으로 삼는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폭력을 정당화하며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희생양의 극단적 사례는 명예살인으로 이어지는 사회도 있다.

지인이 남편의 외도와 지속적인 학대 및 폭력으로 이혼했다.

자식들 때문에 긴 세월을 참고 살았지만,

더는 견디지 못했다며.

그런데 자식들이 엄마가 그렇게 헌신하고 노력하며

사는 모습을 지켜봤으면서도 아빠 편을 든다며 하소연했다.


그녀는 자식들의 배신에 더 깊은 상처를 받았다며 울먹였다.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운 자식들이

이혼한 엄마의 상처와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현상은

가족 희생양 메커니즘의 한 사례다.


이혼하는 과정에서 아이들도 정서적 피해에 노출되었고

그들은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책임을 떠넘길 대상이 필요하다.

힘을 더 많이 가진 아빠에게 동조해야 그나마 마음에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가정이라는 틀을 어떻게든지 유지하고

그 속에서 그냥 견뎌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깃들여 있다.

귀책사유가 분명하게 아빠에게 있었음에도,

엄마를 비난했다는 점이 이혼했다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고 했다.

아들이 보낸 문자가 떴다.

“엄마 마음대로 하실 거면서 뭘 이해해 달라는 거예요?”

문자에 온기는 없고 열기만 가득하다.


아빠, 엄마가 다툰 일에 대해 화가 잔뜩 난 아들 말이다.

엄마가 좀 참으면 될 것을 왜 그러냐는 메시지로 읽혔다.

참 섭섭하고 외로웠다.

어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말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부모가 다툰 일을

아들이 알게 한 잘못이 더 크다.

아이들은 부모를 요람으로 알고 살아간다.

90살 먹은 아버지가 칠십 인 아들에게 차 조심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초겨울 아침 찻물을 끓이면서

포트 속의 물이 아지랑이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포트 속에서 끓는 물처럼 자기 세계 속에서 많은 갈등과 번뇌에 마주한다.

더러 회피하고 더러 해결하려 애쓰면 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는 할 것이 없어지면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비상하는 이들이 있다.

어두운 삶의 울타리에서

더 좋은 내일을 위해 한걸음을 내딛는

이들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승화한 물방울 뒤에 남겨진 물을

찻잔에 담아 한 잔의 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 한잔에 담긴 정제된 고요를 마셨다.


고요란 어떤 것인가?

가장 큰 갈등 뒤에 찾아드는 안식 같은 것이다.

찻물 끓는 모습 속에서

자기를 찾아가는 이들의 몸부림과 아픔을 보았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는

더러 왜곡된 사실들이 숨겨져 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고통의 터널을 건널 때

그것을 뚫고 나오는 것은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이다.


선녀가 잃어버린 날개옷을 찾기를 멈추었다면,

나무꾼의 곁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떨결에 궁지에 몰려 나무꾼의 아내로 산 선녀는

자신의 삶을 모두 탕진한 것이다.


잃어버렸던 자신의 본질을 찾기 위해,

음습한 동굴 속 그림자가 아닌 실체를 찾아 새로운 여정의 첫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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