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고 간 사람

부제: 한 폭의 수채화처럼

by 이슬

두 세시쯤 집을 나섰다.

옆집에 살아도 잘 모르는 옆집 아이 엄마를 만났다.

발레를 전공했다는 그녀는 무척 미인이다.

옆집에 산다는 것은 무척 깊은 인연임에 틀림없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문득 가을이 되니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불씨처럼 숨었다가 다시 살아나곤 한다.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만난 사람으로 인하여

옛 추억의 앨범 속에 숨어있던 이가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한다.


삼사 년 전의 일이다. 정년을 앞둔 퇴직자 대상 연수에서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났다.

연수 프로그램 둘째 날인가, 문경새재 탐방 연수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옆에 앉은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80학번 강원대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린 금세 80학번 대학 1년생으로 회귀하였다.


여수남파랑 캠비치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찼던

그때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대학생선교회에 가입하여 활동했었던 기억이 가장 많이 생각났다.

대학생 선교회는 연합 서클이어서

근처에 있는 대학생들이 모두 모여서 활동했다.


성경공부, 성가 연습 등 신앙인으로서의 소양은 물론

선교인으로서의 능력도 키우는 곳이었다.


그때 강원대생 2학년 선배를 짝사랑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큰 키에 얼굴이 뽀얗고 가늘고 긴 눈으로 미소 짓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바리톤의 목소리로 멋지게 성가를 부르면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는 감동 자체였다.

그를 바라보는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 선배는 모르는 일이 있으면 안내해 주고

도와주며 호의적이고 친절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고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공연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입 회원이었기 때문에 안내 차원에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부끄러워서 그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고

그가 있으면 멀리 돌아서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었다.


참 묘하고도 아이러니한 내 행동이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누구나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떨리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심리가 아닐지….


대학생활에 적응도 하지 못했는데

5.18 사태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언니 집에서 무료한 시간들을 흘려보내다가

2학기 개강을 맞아 등교를 했다.


선교회 활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그때마다 그 선배는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 회관에서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며

우리들의 청춘은 물들어 가고 있었다.


가평으로 엠티도 갔다.

강물에서 물치 기를 하며 깔깔대며 웃어대던

우리들의 모습이 물살에 흔들리며 바람소리에 실려가고 있다.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강변을 걷고 뛰던

그 시절의 설렘과 잡히지 않는 그리움이 성큼 내 가슴에 가을바람을 몰고 오고 왔다. 멀리서 그 선배의 희고 고운 얼굴과 장난꾸러기처럼 천진하게 웃는 모습, 목젖을 울리며 "하하하"울려 퍼지던 목소리가 지금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선교회에 3학년 여자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노래도 잘하고 성적도 우수한 참 멋지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던 선배와 특별한 사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난 부끄러운 마음도 잊고 용기를 내 편지를 썼다. 편지를 부친 뒤 행여 그가 그 편지를 받았는지 어쨌는지 알지 못했다.


그 뒤로는 더욱 그 선배를 피해 다니게 됐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는데 왜 바보같이 말 한마디 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후회스럽다.


2학년 겨울 방학 때 두 분이 정식으로 약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혼자서 몰래 그리워했고 혼자서 이별했던 첫사랑, 짝사랑의 기억은 찬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낙엽이 거리를 휩쓸고 갈 때마다 떠나가는 기적소리처럼 나를 흔들었다.


학교를 졸업하자 서울로 발령을 받고 대학생선교회 활동도 그만둔 나는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 선배가 아직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에서 살고 있을까?


후쿠오카 유후인 마을 단풍


그에게 물었다

" 혹시 김○○이란 분 아시나요"

다행히 모른다고 했다.

아쉬움과 미련 그리고 그냥 그는 그리움으로,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으로 여린 스무 살의 내 모습과 함께 남아 있기를 기원해 본다.


80학번 연수생은 내게 그리웠던 얼굴 하나를 불러냈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면 우린 모두 가까운 사람들인 것 같다.

한번 스치고 간 사람은 단지 그냥 흘러가는 짧은 스침이었을 뿐이었던 것일까?


둘이 서로 사랑했던 사이라면 우연히라도 마주칠 가능성도 있을지 모른다.

그저 내가 혼자 몰래 가슴에 품고 애끓였던 것은 일방적인 것이어서 인연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내 삶도 깊어가고 있다.

스치고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사랑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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