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대중문화

by 박근홍
90년대 들어 게임이 끝났음을 감지한 80년대의 문예활동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변신을 서둘렀다. 조직활동을 내세우던 사람들답게 청산 속도도 빨랐다. 문화예술 활동가들 가운데 순진한 몇몇은 절망감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했으나 인생을 경영할 줄 아는 이들은 자신들이 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적당히 차용하는 대중예술 평론가로 명함을 바꿨다.
(김규항, 1998, "지식인들 록을 고르다")


이미 학벌 카르텔, 그러니까 대학 전공으로 존재하는 예술들을 제외한 대중예술 평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확실히 자칭 진보들이다. 특히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 미 제국주의의 첨병이 저항 정신의 전위가 되고 너바나 트리뷰트로 시작된 씬은 산울림의 적자가 되었다. 정보 접근이 제한된 시절 미국 혹은 일본 잡지 기사 번역도 버거웠던 기존 평론가들이 할 수 없던, 이른바 구조적 분석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굵어질 대로 굵어진 머릿속에 새삼 사춘기 암내 풀풀 나는 음악들을 쑤셔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진정성에 대해 팬들은 물론이고 음악가들로부터도 자주 의심받곤 했다. 어쨌든 먹사니즘이 시대정신인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진보호소인이든 태극기보수든 호구지책으로 문화평론을 하겠다는 걸 뭐라고 할 생각도 자격도 없다.


문제는 ‘그 진정성’이다. 30여 년이 지났음에도 달라진 게 없다. 장르의 팬들이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작품들에 대한 경험도 이해도 공감대도 없다. 글이야 어떻게든 쓰겠지만 여전히 겉핥기 수준이다. 그 공허함을 자칭 진보적 ‘진정성’으로 대체한 덕분에 모든 평론이 틀에 찍은 듯이 똑같다. 그런데도 여전히 주제 파악 못 하고 평론의 위기를 운운한다.


더 큰 문제는 그 글이 매체를 통해 유통된다는 것이다. 작품에 관한 내용 없이 프로파간다만 반복하는 글에 질린 대중은 자연스럽게 평론에서 멀어진다. 자칭 진보 평론가들의 가장 큰 해악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평론의 기준을 파괴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숫자만 남았다. ‘그래서 조회수 얼마나 나오는데요?’


이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 다시 한번 명함을 바꾼다. ‘대중예술 평론가’에서 ‘대중예술산업 평론가’로. 저항정신의 전위는 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전락했다. 그걸 전락이라 생각한다면.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한국에서는 반지성주의 때문에 평론이 설 자리가 없어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진보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