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할말,잇슈(issue)다! 네 번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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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첫 방송부터 갖가지 논란에 휩싸였던 SBS 월화드라마 <조선구마사>가 끝내 단 2회 만에 폐지(방영 취소) 되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다. <조선구마사>는 조선 초 태종과 충녕대군(훗날 세종)이 악귀에 맞서 싸운다는 내용으로 ‘한국형 엑소시즘’을 그려내고자 했으나 태종을 폭군처럼 묘사하는 등 실제 기록과 달리 조선 왕실을 부정적으로 표현했다는 의혹과 함께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지난 22일에는 ‘중국풍’ 소품을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인 양 표현한 장면들이 문제가 되었다. 최근 중국의 ‘문화 동북공정’ 이후 시청자들의 반중(反中) 정세가 거세진 상황이었던 만큼 많은 시청자들의 반발이 빗발쳤고 급기야 드라마 폐지에 대한 청와대 국민청원도 제기되었다. 이에 기업들과 지자체들까지 지원 철회 의사를 밝히자 방송사와 제작사 양측은 결국 사과문과 함께 드라마 폐지 및 VOD 서비스 중단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계획적으로 제작된 ‘팩션’(faction) 콘텐츠였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와 제작사, 출연진 모두 내용에 대해 철저하게 사전 검토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과 함께 사과문과 달리 논란 이후에도 해외 OTT 플랫폼 서버 내에서 여전히 <조선구마사> VOD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시청자를 기만했다는 비판들이 이어졌다. 한편, 해당 드라마 메인 작가였던 박계옥 씨와 관련해서도 전작인 tvN 드라마 <철인왕후>를 비롯해 집필한 드라마 대부분이 ‘혐한’ 논란에 휘말렸었다는 사실 또한 밝혀지면서 역사 왜곡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실, 이번 논란 이전에도 우리 사회에서 역사 왜곡 논란은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이 추진한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와 일본 교과서 내 ‘위안부’ 및 ‘독도 소유권’ 기술에 대한 논쟁 그리고 얼마 전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던 하버드 대학교 존 마크 램지어(John Mark Ramseyer) 교수의 ‘위안부 망언’에 이르기까지 그간 우리 사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논쟁들을 거듭하며 진통을 겪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전에 있었던 논란들 대다수는 어떤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대한 ‘사실 타당성’을 중심으로 타 국가 혹은 타민족 즉,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이질성을 갖는 ‘상대방’이 주장한 내용을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어왔던 반면 이번 논란은 어떤 역사적 사실의 ‘활용’에 대한 ‘가치 타당성’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강도 높은 ‘자아비판’과 ‘자아성찰’을 동시에 보여주는 즉, ‘자정적’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무엇보다, 이번 논란은 역사의 ‘자주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뿐만 아니라 문화 산업에 있어 역사의 ‘생산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왜곡 문제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를 전반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우리 스스로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E.H. 카(Edward Hallett Carr)의 1961년작 <역사란 무엇인가>(원제 What is History?)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 간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문장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책은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E.H 카가 196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강의했던 수업 내용을 옮겨 적은 역사 이론서로 순서대로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부터 <사회와 개인>,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진보로서의 역사>, <지평선의 확대>까지 총 6 부분에 걸쳐 역사의 형성과 흐름, 발전 요인 및 양상 등 역사의 구조 및 구조화 과정에 대한 심층적 분석과 함께 역사 인식의 태도에 대한 논의를 다루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속 E.H. 카의 주장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역사는 역사가의 주관과 관점에 따라 ‘재구성’된 ‘역사적 사실’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기본적으로 과거에 실재했던 ‘사실’과 그에 대한 선대의 기록을 의미하는 ‘사료’를 바탕으로 하나 두 개념은 크기나 양의 측면에서 절대적인 동일성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역사는 다양한 형태의 사료들에 대한 역사가의 주관이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중요성과 필요성에 맞춰 ‘재구성’되며 그 과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을 거듭한다. 이는 곧 역사가가 생각하는 ‘효용성’에 맞춰 역사가 ‘편향적’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실용주의’ 사고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실용주의’와 함께 전개된 역사의 형성에 대한 논의는 E.H 카의 두 번째 주장인 ‘과학으로서의 역사’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개인적’ 상호작용보다 ‘필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 구조적’ 변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며 그 과정에서 획득한 ‘일반성’을 바탕으로 역사는 자체적인 ‘체계성’과 ‘인과성’을 갖춘, 하나의 ‘과학’으로 탈바꿈된다. 이를 통해, 그는 역사에 대한 연구가 곧 과거에 대한 ‘이해’와 현재에 대한 ‘지배’, 미래에 대한 ‘예측’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주장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역사가를 비롯해 역사를 구성하는 주체들의 ‘가치 개입’이 지속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역사가 ‘도덕적’ 성격을 갖추게 됨을 주장했다.
E.H. 카의 마지막 주장은 역사가 역사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역사 형성의 주체들에 의해 끝없이 ‘발전’한다는 문장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이는 앞선 두 주장의 바탕이 되었던 그의 ‘법칙주의’ 역사관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있다. ‘법칙주의’는 19세기 역사학계의 주류 담론을 형성했던 ‘실증주의’ 학풍과 이에 반대하여 등장한 ‘주관주의’ 학풍을 변증법적으로 절충, 실증주의가 강조했던 ‘객관성’ 그리고 주관주의가 강조했던 ‘주관성’의 병치를 주장한 역사 접근 방식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그는 역사가와 사실 간의 평등한 관계 위에서 다시 말해, 하나의 ‘법칙’ 위에서 이뤄지는 ‘선택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상호작용이 곧 역사임을 주장하고자 했다.
E.H. 카의 논의는 ‘역사학’의 차원보다 ‘역사 비평’의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여러 비판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법칙주의라는 새로운 역사관을 통해 역사 형성의 주체로서 역사가라는 개인이 갖는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사회 구조와 ‘대등한’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한, 역사가를 비롯한 각각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역사 형성의 주체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을 부여함으로써 ‘복안적’ 성격의 역사 인식을 갖추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재구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나아가, 역사 인식에 대한 E.H. 카의 논의는 ‘인문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 하여금 ‘역사 기술에 대한 인식’을 되돌아보게끔 만든다. 개발 논리에 지친 탓이었을까, 정신적 안정을 강조하는 탈물질주의에 이끌린 탓이었을까,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는 인문학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지자체들이 인문학 도시를 표방하며 나섰고 각종 서적과 TV 프로그램, 강연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문가들을 초빙해 인문학의 이야기를 쏟아내기에 바빴다. 그 ‘열풍’ 속에서 역사 분야 또한 그간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한’ 학문으로만 여겨지며 외면받았던 지난날을 지나 예능 프로그램이나 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쉽고’, ‘흥미롭고’,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서 대중들에게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다.
문제는 ‘역사에 대한 기술’ 다시 말해, 얽혀있는 역사를 풀어가려는 움직임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있었던 한국사 강사 설민석 씨의 역사 왜곡 논란을 떠올려보자. 설 씨의 경우 과거 한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 스타 한국사 강사로 출연, 해박한 역사 지식과 함께 화려한 말솜씨를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단숨에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다. 이후 방송가의 러브콜을 받은 설 씨는 조선사와 한국 근현대사 등 역사 분야 프로그램은 물론, 인문학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한편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지난 12월 19일 tvN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클레오파트라 편 방송 직후 한국이집트학연구소장이자 국내 유일의 이집트학 고고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곽민수 씨에 의해 해당 강의가 잘못된 사실관계와 사료들로 점철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설 씨는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그와 함께,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 등 설 씨가 과거에도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렸었다는 사실 또한 밝혀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부 누리꾼들은 설 씨의 학력에 대한 지적을 통해 역사 전문가이자 강연자로서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내세운 한편 다수의 전문가들은 그의 강의가 상업주의의 구조적 영향력 아래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전달된 ‘역사 이야기’라는 의견에 입을 모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는 곧 오늘날 다양한 매체에서 이뤄지고 있는 ‘스토리텔링’과 ‘역사 기술’ 간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 중 스토리텔링의 사례로서 우리는 지난해 6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첫 선을 보였던 SBS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을 살펴볼 수 있다. 해당 프로그램은 과거 유명했던 범죄 사건들을 당시 사회문제와 연계해 소개해 준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흥미를 사로잡은 것은 물론, 마치 가까운 지인과 일대일로 만나 수다를 떨 듯 출연진들이 시청자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대중들의 몰입도를 높인다. 물론, 기존에 있었던 영상 중심 고발 프로그램들보다 특정 사건, 사고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여주곤 있지만 빠른 편집과 함께 범죄에 얽혀있는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을 보다 생생하게 들려주며 2049세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러나, 역사 기술은 지식과 경험, 역량 등 다방면에서 역사에 대한 논의 전반에 효율성을 가져다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신뢰의 관계를 가져다줄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전문가의 전문성이 ‘우위적’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논의를 일방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쓰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전문성은 ‘수평적’ 사고 위에서 자신들을 비롯한 전문가 집단이나 대항 전문가(counterexperts) 집단 나아가, 일반 대중과의 쌍방향적 과정을 ‘체계화’하고 ‘구조화’함으로써 각자의 ‘주관성’이라는 가치를 인정하는 데 쓰여야 한다.
또한, 역사 기술은 단순히 ‘일회적’ 차원에서의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발판 삼아 역사에 대한 접근을 보다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고 보다 더 다양한 관점들이 형성될 수 있게끔 하는 ‘매개성’을 갖춰야 한다. 이를 통해, 비단 전문가 혹은 전문가 못지않은 전문성을 갖춘 주체들뿐만 아니라 역사에 뚜렷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역사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으며 나아가, 저마다 다른 역사적 의식을 형성할 수 있게끔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번 논의는 오늘날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은 역사가 보여주는 다양한 ‘활용’에 대해 우리가 주의력을 갖춰야 한다는 논의로 귀결된다. 때로는 ‘조선시대판 워킹데드’로 불리며 전 세계의 많은 사랑을 받은 <킹덤>과 같은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때로는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등의 첨단과학기술을 통해 역사는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는 탄생을 거듭하고 있다. 역사의 재구성을 둘러싼 상호작용에 있어서 ‘참여’와 ‘책임’이라는 의무를 갖고 있는 우리의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1993년 초판된 이후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창비) 서문에 적혀있는 위 문장은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끝없는 경험과 인식 속에 성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믿게끔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문장은 우리를 둘러싼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냉혹한 전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이자 우리를 살게 하는 이유,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이유인 역사의 길 위에서 우리 스스로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길 바라며 글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