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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넴의 글 Sep 11. 2021

'상상' 속 이야기를 직접 '경험'해보기 [영화]

영화마다 철학담아

*본 게시글의 원문은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artinsigh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354)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실존이라는 것은 ‘자연 속에 파묻힌(buriedin nature)’ 의식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에로의 열림은 종교적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인식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머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성과 속> (The Sacred and The Profane) 中


 왜 ‘종교’(宗敎, religion)일까? 보이지 않는 절대성에 기대 내세의 행복을 소망하는 종교의 이야기는 얼핏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는 건축과 미술 양식으로, 때로는 공동체 의식으로 우리의 '현실'에서 종교성을 마주하곤 한다. 우리는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번 글은 신화, 전통, 관습 등 인간의 ‘종교성’이 담긴 문화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성스러움’에 주목했던 머치아 엘리아데의 ‘성현’을 통해 영화 <클라우스>(2019)를 살펴보면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성스러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성’(聖)으로 ‘연결’된 인간과 종교에 대한 철학



 종교성을 곧 인간성으로 여기며 인간 존재를 ‘종교적인 존재’ (homo religiosus)로 보고자 했던 머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철학과 종교, 문학에서 뛰어났던 그는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이탈리아 철학을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 속에서 인간성이 잔혹하게 파괴되는 모습에 회의감을 느낀 그는 신부(神父)가 되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면접시험을 기다리던 중 인도 철학자 다스쿱타 (Surendranath Dasgupta)의 <인도 철학사>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를 접하게 된 그는 서양 철학과 다르게 다른 학문에 대한 ‘배타성’이 없는 동양 사상과 종교에 매료된다. 이후 인도로 건너가 다스쿱타 교수 밑에서 머무르면서 엘리아데는 중국을 비롯한 여러 문화권의 농경문화가 갖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를 ‘우주적 종교’ (cosmic religion)라고 명명하고 각각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에 내재된 인간 의식의 ‘보편성’에 주목하게 된다.  


인류 보편의 개념으로서 종교를 바라보았던 엘리아데.


 유럽으로 돌아온 엘리아데는 요가와 같은 종교적 수행을 비롯해 신화, 관습, 전통, 상징 등 종교문화 전반에 걸쳐 수필과 소설 등을 저술하는 한편 1939년부터 연금술, 불교, 우파니샤드 (Upanisad, 고대 인도의 철학 경전) 연구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종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기독교적 사고를 관념적으로 증명하려던 호교론(護敎論)에 진화론을 더해 종교학을 이끈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Friedrich Max Müller)와 전 세계 신화 간의 유사성 및 관습 간 동일성을 밝히고자 했었던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James George Frazer)의 종교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종교를 ‘형이상학적’ 차원으로만 다루었던 기존의 종교현상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종교와 관련된 인간 현상을 ‘합리성’을 가진 실재(實在)로서 해석하고 이해하고자 했다.


 엘리아데는 종교와 관련된 문화 제반을 ‘세속적인 것’(le profane)과 그에 대비되는 ‘성(聖)스러운 것’(le sacré)으로 구분하고 ‘성현’(聖顯, hierophany)의 개념을 통해 이를 ‘변증법적’으로 구조화시키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일상적이고 역사적이며 유한한 ‘세속적인 것’과 이와 대비적으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이며 무한한 ‘성스러운 것’은 이분법적으로 나뉘면서도 ‘역설적으로’ 성의 성질이 세속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성현의 과정 즉, 모든 사물에 내재된 성스러움이 자기 자신에 의해 육화(肉化)됨으로써 마침내 자신이라는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나무는 그 나무가 성스러운 존재임을 스스로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더 이상 직접적인 차원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차원으로 ‘성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엘리아데는 ‘거룩함’(das Heilige)이라는 개념으로서 종교를 단순히 ‘믿음’의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독일 종교현상학자 루돌프 오토 (Rudolf Otto) 중심의 비합리적 사고에서 벗어나 ‘체험’의 차원에서 종교를 설명함으로써 인간이 본질적으로 종교와 ‘불가분한’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나아가, 종교학 연구에 있어서도 그는 성과 속의 문제를 합리성-비합리성 / 자연성-초자연성과 같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양자택일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체험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면서도 합리적인 것에서 비합리성을 ‘재현’하는 다시 말해, 성과 속의 ‘총체성’에 기반해 바라보고자 했다.  


'성'과 '속'의 경계 속에서 인간은 경험의 존재로 새롭게 정의된다.


 한편, 종교문학 작가이기도 했던 엘리아데는 신화를 비롯한 ‘성스러운’ 이야기를 만드는 인간의 ‘상상력’ 다시 말해,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인간의 필수적 조건임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상상력은 곧 인간이 의식적 차원의 ‘내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이자 이미지로 가득한 세계, 시간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세계에 맞설 수 있는 ‘균형감’으로서 그 역시 종교학 연구 중에도 <이사벨과 악마의 물> (Isabel and the Devil's Water), <금지된 숲> (Forêt interdite) 등 소설과 기행문을 저술하는 등 문학적 측면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물론, 현상학적 환원주의를 바탕으로 각각의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주관성’과 ‘역사성’을 제거하고자 했던 그의 연구 태도는 역사적 조건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역사성 다시 말해, 하나의 상징체계를 통한 해석을 위해서 그보다 ‘선행’되는 상징체계가 필요한 문제점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미’와 구성 과정에만 초점을 맞춘 채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재현되는 종교현상의 ‘내용’을 분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엘리아데의 이론은 ‘성현’의 개념을 통해 현존하는 종교적 사물을 비롯한 종교문화에서 종교성이 나타나는 ‘과정’을 ‘도식화’시킴과 동시에 개별성보다 ‘보편성’의 차원에서 인간의 종교성을 이해함으로써 인간과 종교 간 ‘새로운 휴머니즘’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에게 ‘선물’로 남겨진 ‘성물’(聖物)에 대한 영화



 엘리아데의 ‘성현’ 개념과 함께 살펴볼 영화 <클라우스>는 누구나 편지에 적은 약속을 지키면 선물을 나누어주는 ‘빨간 옷 입은 뚱뚱한 사람’의 이야기에 대한 소개와 함께 시작된다.


 주인공 제스퍼는 왕립 우정 공사 총재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왕립 우편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되지만 게을렀던 그는 적응하지 못한 채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이에 제스퍼의 아버지는 그에게 우체부들이 가장 기피하는 ‘스미어렌스버그’에서 1년간 지내면서 6000통의 편지를 배달해야 하는 임무를 주게 되고 제스퍼는 할 수 없이 스미어렌스버그로 향하게 된다. 


영화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산타클로스'라는 영적 존재를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크럼과 엘링보, 두 가문 간의 기나긴 대립으로 인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만이 남아있었고 어떤 노력에도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무기력해진 제스퍼에게 선장 모건은 산지기를 만나볼 것을 권유한다. 이에 제스퍼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산지기가 있는 산장을 찾아가지만 그의 무서운 겉모습에 겁을 먹고 결국 마을을 떠나고자 다짐한다. 바로 그때, 제스퍼 앞에 산지기 클라우스가 나타나 산장에서 발견한 아이의 우울한 그림을 보여주며 자신을 대신해 장난감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선물을 전해준 다음날, 선물을 받고 싶어 자신을 찾아온 아이들을 본 제스퍼는 그들을 이용해 우편량을 늘릴 계획을 세우게 되고 클라우스에게 편지를 보내면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클라우스와 엘바를 찾아가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선물해 주자고 말하는 한편 편지를 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달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제스퍼의 말이 못 미더웠지만 장난감과 학교 수업을 통해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게 되면서 그의 제안에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다. 한편, 나쁜 일을 하면 선물을 받지 못한다는 제스퍼의 말에 아이들이 마을을 위해 선행을 시작하게 되었고 마을의 분위기 역시 조금씩 밝아진다.  


'산타클로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영화는 순수하고 유쾌한 '상상'으로 그려내며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갈수록 아이들에게 나눠줄 장난감이 부족해지자 제스퍼는 장난감을 더 만들어 크리스마스에 나눠줄 계획을 세운다. 그때, 그가 실수로 병으로 먼저 떠난 클라우스의 아내 리디아와 관련된 물건을 건드리게 되자 클라우스는 제스퍼의 곁을 떠난다. 홀로 남게 된 제스퍼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편지를 적지 못했던 사미족의 마르구를 위해 직접 선물을 준비하는 선의를 보이게 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아내와 함께 장난감을 만들 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오해를 풀게 되고 두 사람이 준비한 선물에 감동한 마르구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찾아와 크리스마스에 나눠줄 장난감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다가온 크리스마스이브. 그동안 제스퍼와 클라우스에 의해 마을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한 각 가문의 대표들은 두 사람을 멈추기 위해 일부러 의미 없는 편지들을 보내 우편량을 채우는 한편 그들이 만든 장난감들을 없애고자 산장을 습격한다. 한편, 아버지에 의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선물을 나눠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된 제스퍼는 마을을 떠나고자 하지만 아버지를 설득해 다시 돌아오게 되고 짓궂은 방해 공작을 피해 클라우스와 함께 성공적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주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스미어렌스버그는 활기를 되찾게 되었지만 할아버지가 된 클라우스는 결국 마을을 영원히 떠나게 된다. 하지만,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온다고 전해진다.  


영화는 단지 '성스러움' 혹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고자 한다.


  영화 <클라우스>는 ‘선의’를 통해 ‘인간성’을 갖춘 존재가 되어간 제스퍼의 이야기이자 ‘상상력’을 통해 ‘산타클로스’라는 ‘성스러움’을 갖춘 존재가 되어간 클라우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할 수 없이 스미어렌스버그로 향하게 된 주인공 제스퍼. 그에게 있어 산지기 클라우스와 선생님 엘바,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 스미어렌스버그는 엘바의 말처럼 ‘탈출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클라우스를 만나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나눠주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서로에게 ‘선의’를 베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 제스퍼는 그동안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움직였던 모습을 잊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 수 있는 존재이자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선택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한편, 아이가 생기기를 기다리며 함께 장난감을 만들었던 아내 리디아를 먼저 떠나보낸 후 할 수 없이 산장에서 지내던 주인공 클라우스. 그에게 있어 삶의 의미 그 자체였던 아내가 떠난 스미어렌스버그는 홀로 지내야만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제스퍼를 만나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나눠주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게 된 클라우스는 그동안 굳게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제스퍼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마침내 성스러운 존재로 거듭난다.  


어떤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곤 한다.


 이때, 영화는 클라우스가 ‘성스러움’의 ‘바람’을 ‘경험’하는 장면들을 통해 ‘평범했던’ 그가 점차 산타클로스로 ‘성현’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먼저, 제스퍼가 아이의 그림을 잃어버렸을 때 성스러움을 느낀 클라우스가 이를 발견하게 되면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 데 이어 제스퍼가 편지를 쓰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나눠주자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역시 클라우스가 성스러움을 느끼면서 제스퍼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시간이 흘러 클라우스 본인이 더 이상 선물을 나눠주기 어려워졌을 때조차 성스러움을 느낀 그는 속의 세계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곧 자기 자신을 초월한 그가 ‘성’의 존재가 되어 마침내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 하나의 종교적 '현상'이 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마침내 ‘상상력’을 통해 나타난 ‘인간성’의 ‘이야기’



 영화 <클라우스>는 이처럼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존재이자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Saint Claus)의 비화(祕話)일 수 있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 영화이다.


 실제로, 산타클로스의 이름은 기원전 3세기경 지금의 터키 마이라(Myra) 지역에서 사회선교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선의’를 베풀었던 성 니콜라우스 주교 (Saint Nicholas of Myra)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크리스마스와 같은 날짜인 율타이드 (yuletide, 크리스마스 무렵 고대 로마의 동짓날)에 오로라와 은하수를 보는 관습이 있던 북유럽 사람들이 이를 북유럽 신화의 주신(主神) 오딘(Odin)의 흔적이라고 믿으며 산타클로스에 투영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권의 ‘개별적’ 이야기들이 합쳐져 하나의 ‘보편성’을 갖춘 성스러움의 이야기가 된 것처럼 영화 역시 산타클로스에 대한 아이들의 ‘상상력’을 통해 ‘속’의 존재였던 클라우스가 점차 산타클로스라는 ‘성’(聖)의 존재로서 ‘만들어지는’ 즉, ‘성현’의 과정을 보여준다. 나아가, ‘선’(善)의 윤리를 상징적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엘리아데의 말처럼 인간성과 종교성을 ‘동일선상’에 위치시키고 결국 인간과 종교가 ‘불가분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선한 행동은 또 다른 선한 행동을 낳는 법이지."

                                                                             -<클라우스>(Klaus) 中 ‘클라우스’의 대사

 

 지금 이 순간도 종교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인간 존재의 곁에서 여전히 '호흡'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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