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인간 Oct 19. 2023

시를 그리는 소년 4

나무인간 64

* 2023 서울시립 난지창작스튜디오 도록에 실릴 텍스트의 본문 중 일부입니다.

시를 그리는 소년

시를 그리는 소년


외계(外界)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畫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경주/ 외계(外界)/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 지성/ 2012    




 내가 목격한 한성우의 시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온,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고 있을 별의 궤도이었다. 냉철히 이탈하지 못했으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한 번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시,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의 손에 쥔 마지막 별의 빛. 침묵이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생각하는 바로 그때, 말할 수 없게 되거나 생각할 수 없게 되는 존재들이 꽃이나 뜯어진 벽지나 도로 위에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가 되어 물속에서 반짝거리며 우리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유리 파편의 모습을 하고 되돌아온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위해 뚫어 만들고 통과하는 터널- 그 구멍이고, 그 구멍이 어떤 존재들이 간신히 고여있을 수 있는 웅덩이라는 것을, 그 웅덩이를 뒤집어쓰면 축축한 시가 된다는 것을, 그 축축한 사랑의 시 없이는 삶이 사막이 되고 우리는 모래처럼 흩날리고 부서지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일과 이미 거기 있는 구멍을 알아보고 그 구멍을 메우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구멍이란, 소년의 시가 우리 가슴에 이미 쳐둔 동그라미표이기도 하다는 것을. 누군가 발견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시를 그리는 소년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