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에 한해 마무리로 혼자 인왕산에 올랐다. 더워서 멈춰졌던 산행이 반년동안 가지 않다가 갑자기 산에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지하철 타고 독립문역에 내렸다.
지금까지 오르던 코스와 달리 처음부터 경사진 코스를 출발해서 정상까지 올라갔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등은 축축하게 젖고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날씨가 좋지 않아 남산타워가 뿌옇게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그냥 땀 흘리고 올라오고 싶은 욕망을 채웠기에. 싱거울 정도로 빨리 정상에 올라와버렸다. 그리고 내려와 다시 북악산에 올라갈까 하다가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 청운도서관으로 방향을 틀었다.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다가 감기가 지독하게 걸릴까 싶어서 도서관에 따뜻한 히터 바람을 쐬면서 이윤기선생님의 그리스로마 신화 책을 읽었다.
배낭 안에 믹스커피를 타서 창가 대나무 몇 그루가 심어진 중정을 바라보며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칼바람을 맞으며 걸었다가 따뜻한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니 몸이 노곤해지면서 기분 좋게 나른해졌다. 책 내용은 몇 번씩 읽어봤던 것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림만 몇 장 훑어보다 덮었다. 한참을 중정을 쳐다보는데 괜히 웃음이 삐질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침에 산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을 채우고 더불어 이렇게 멋진 장소에서 커피 향기를 맡으며 책을 읽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2
새해 첫날 동네 정발산에 올라 해맞이를 했다. 일산에 살면서 정발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풍경은 처음이라 낯설고 생경했다. 구름이 많이 낀 날씨에 해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구름사이로 시뻘건 여의주같은 둥근 덩어리가 구름 밖에 잠깐 보였다. 사람들은 각자 소원을 빌거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느냐 다들 분주해보였다. 나의 낡은 핸드폰으로 아무리 잘 찍어도 눈에 담아두는 것만큼 예쁘게 찍히지 않기에 한 장 대충 인증샷만 찍고 해 구경, 사람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3
재작년에 갑자기 공황장애가 심하게 와서 일 년 동안 약을 먹었다. 차츰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장거리 차를 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오는 마지막이 차타는 것인데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자꾸 회피했다. 예전 같았으면 불편해도 그 감정을 돌보지 않고 그냥 꾹 참았는데 이젠 참으면 몸에서 바로 반응이 나타난다. 강릉에 2년 동안 가지 않았다. 결혼 후 한 달에 한번은 꼭 갔었는데 공황장애가 온 이후로 피해야 할 곳 1위가 되어버렸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는 이곳은 친정과 시댁이 같은 도시 안에 있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곳은 감정적으로 너무 버거운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냥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런 날들이 많았다. 친구가 맛있는 거 사 줄 테니 한번 오라고 전화가 왔다. 차를 타는 게 힘들다고 대답은 했지만 친정과 시댁이 아닌 그냥 친구만 보고 온다면 내감정이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느닷없이 들었다.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고속버스 티켓팅을 했다. 다음 주에 혼자서 강릉에 간다. 표를 다시 환불할 수도, 아니면 정말 친구랑 같이 맛있는 회를 먹을 지도 어느 것도 확신 할 수 없지만 그냥 내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해 봐도 몸이 괜찮다고 하지 않을까. 내가 걱정하는 것 보다 세상은 별일 없이 돌아간다. 강릉에 친정집에 시댁에 들리지 않고 친구만 만나고 온다고 해서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만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강릉에 간다는 건 2년 만에 아니 결혼 20년 만에 하는 혼자 하는 여행이자 나의 소소한 일탈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한번쯤은 살아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