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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빨간 갱년기 Jan 04. 2024

12월이 가기전에

2023년 한해를 돌아보며

어느 때 부터인가 새해가 시작되면 다이어리에 더 이상 한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버킷리스트라고 숫자를 써가면서 적었던 것도 무의미해졌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하는 것들을 버킷리스트라고 적어놓으면서 나 자신에게 희망고문 하는 것 같았다.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니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고, 그러고 나니 불안감이 사라졌다.


올해는 그냥 나를 내려놓고 살았다.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봤다. 아직 달력이 두 장 남아있으니 조금 더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가을이 갑자기 닥쳐왔다. 주방창문 너머에 나뭇잎 색깔이 하루하루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며 낙엽들이 소용돌이 칠 때 정말 가을이 왔구나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아직도 여름 속에 갇혀있는데. 


탁상용 달력을 들춰본다. 올해 열 달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면서 지냈는지 간단히 적혀있는 메모를 훑어보았다. 

1월과 2월에는 소위 벽돌 책이라고 불리는 과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부터 도킨슨의 이기적유전자까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시리즈도 읽었다. 뭘 알고 읽은 것은 아니다. 그냥 읽고 싶어졌고 그래서 그냥 읽었다. 

과학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별에서 왔고 별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 이 단순한 진실이 내 삶의 무게를 엄청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3월에는 산에 가기 시작했다. 2주에 한 번꼴로 북한산이나 인왕산 등 서울 주변의 산들을 발톱이 까맣게 죽도록 다녔다. 연두색 잎의 색깔이 진한 초록으로 바뀔 때까지 바지런히 산에 올랐다. 동네언니랑 같이 산에 가기도 하고 시간이 맞지 않으면 혼자서도 산에 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봤는데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야경을 보기위해 밤에 산에 오르기도 했다. 처음엔 너무 일찍 올라가 모기랑 벌레들과 사투를 벌이다가 야경도 보지 못하고 그냥 내려왔다. 아쉬움에 다시 도전하게 되었고 이번엔 좀 더 치밀하게 해가 지는 시간을 계산해 올랐다. 밤의 산의 모습은 낮과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들이 내 가슴을 간질간질 혹은 뒹굴뒹굴하게 그리고 야하게 채워줬다. 

올해 여름은 숨 막히게 더웠다.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의 온난화 현상의 여파로 잦은 비와 찜통 같은 습기, 그리고 한낮의 더운 열기는 산에 대한 열정을 식혀버렸다. 


초여름에 들어가면서 집안 공기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둘째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집과 학원으로 더 단순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시기에 가족들 사이에 해묵은 감정들이 올라와 늘 살얼음판 같았다. 아이는 학교가 싫어서 그만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그만둔다고 했는데 나의 눈에는 그냥 핑계처럼 보였다. 올빼미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다시 코로나시기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밤낮이 바뀐 아이의 모습을 참다못해 화가 폭발하기 직전까지 몇 번을 드나들었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자체가 너무 답답했다. 


아침을 차려놓고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공공서비스의 최적화 장소인 도서관은 나의 도피처이자 낙원이었다. 소설, 웹툰, 에세이, 자연과학, 철학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운 좋게 동네서점에서 독서모임과 글쓰기 모임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낯선 타인들에게 나의 생각과 일상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면서 스스로를 치유해 나가고 있었다. 


석 달 동안 글쓰기 모임에서 나의 글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다섯줄 쓰는 것도 벅찼는데 이젠 A4용지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내공이 쌓여갔다. 


올해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약이 하나 늘었다. 고지혈증 경계단계로 음식이나 운동이 아닌 약으로 조절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나의 몸은 이렇게 서서히 노화되어 가고 있구나 생각하니 조금 서글퍼졌다. 

운동은 점점 하기 싫어지고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에 부쳐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꼭 쪽잠을 자는 버릇이 생겼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친구들이 놀러왔다. 둘째를 뱃속에 가졌을 때부터 만나왔으니 거의 이십 년 지기들이다. 오랜만에 분위기 좋은데서 밥 먹고 차 마시는데 밥과 차보다 이야기가 더 고팠는지 수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보낼 때 아쉬워 집에 있는 밤과 살림살이들을 챙겨 바리바리 싸주었다. 더 주고 싶었는데 가진 게 너무 빈약해 속상했다. 서로서로 안아주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들은 나의 삼사십 대를 같이 보내준 소중한 이들이었다. 떠나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11월 큰아이가 수능을 보고 대학 원서를 접수하면 겨울이 올 것이다. 올해 겨울은 좀 포근했으면 좋겠다. 작년에 너무 많은 일들을 겪고 나서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올해 열 달을 잘 지내왔다. 남은 두 달 마음 졸이지 말고 편안하게 잘 지내고 싶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사는 게 재미있다고 하지만, 마지막 한 달은 아이들의 뜻이 이루어지는 달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마음이 조금 더 몽글몽글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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