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불령 가게마씸
샤려니숲길은 물찻오름, 말찻오름, 마은이오름, 붉은오름, 거린오름, 샤려니오름을 아우르는 약 15km 숲길이다. 그 말인즉슨 오름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오름들 가운데 버스 노선표에서 봤던 붉은오름을 택했다. 샤려니숲길에서 바로 갈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 모르니까 확실하게 입구에서 가는 길을 택했다. 입구 왼편 도로변 옆에 무성하게 자란 넓은 풀밭을 걸어서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을 향해 걸었다. 오름 매표소까지 약 1km쯤 걷는 동안 도보여행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사려니숲길에서 보았던 그 많던 여행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허허벌판에 홀로 내던져진 것 같은 헛헛함이 느껴진다.
얼마지 않아, 대로변 왼편에 붉은오름자연휴양림 표지석이 보인다. 그 길로 들어서자 붉은 화산송이인 '스코리아'가 쭉 깔린 넓은 길이 드러난다. 길 양쪽으로 늘어서있는 나무들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다.
나무들의 환대를 받으며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고 붉은오름의 발끝에 내 발끝을 맞댄다. 촘촘한 숲길을 보니 강보에 감싸인 아기처럼 아늑해진다.
오름을 오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나 혼자다. 하지만 여행 둘째 날 홀로 고내봉에 오를 때, 주저하고 걱정되는 마음은 이제 없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조금도 불안하지 않다. 나는 붉은오름의 너른 품에 나를 맡기기로 했다. 오름을 오르면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성큼성큼 걸으며 숨이 찰 때, 잠깐 멈추어서 숨 고르기를 한다. 기분 좋은 발열이 시작되자, 외투를 허리춤에 묶고 걷는다.
붉은오름은 경사가 완만한 왕복 2킬로 오름이다. 등반로 시점에서 삼거리까지 240m 외에 나머지 길은 둥글게 도는 길이므로 동선이 겹치지 않아 좋다.
정상에 오르니 탁 트인 전망이 참 시원하다.
붉은오름 전망대에서는 민오름, 머체악, 거린악, 사려니오름, 마흐니오름, 논고악, 물찻오름, 말찻오름, 물장오리오름, 견월악, 절물오름, 거친오름의 능선이 보인다. 이름들이 하나같이 독특하다. 내가 자주 들르는 <제주 오름을 담다> 밴드에서는 운영자가 매번 새로운 오름에 오르고 이름의 뜻을 알려주는데 많은 경우 제주방언의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나라 산들 이름이 보통 한자말로 불리는 것과 달리 제주방언의 이름으로 불리는 오름이 나는 참 좋다. 굳이 이 오름들의 뜻을 해석해 주는 이는 없더라도 상상해 보면 연상이 되는 말들도 있다. '악'은 산 이름과 마찬가지로 험준한 오름에 붙는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험준하다한들 보통 산들에 비하면 순하디 순한 오름들이지 않나 싶다.
붉은오름 전망대는 가로세로 폭이 3미터가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좁은 공간으로 등받이 없는 벤치 2개가 가로와 세로로 난간 옆에 하나씩 길게 놓여있다. 위 사진은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이어서 꼭 엿가락처럼 길게 늘여져 있어서 공간이 변형되어 보인다. 내가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먼저 올라왔던 여자 2명이 내려갔다. 공간이 좁다 보니 나를 배려해 준 것 같다. 정상은 탁 트여있는지라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다. 나는 센 바람을 좋아한다. 특히 맞바람으로 맞는 바람이 좋다. 벤치에 올라서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보았다.
저 멀리 있는 오름들, 마치 품을 벗어난 자식들이 여기저기 타지로 나가 자리 잡고 살고 있는 모습 같다. 아이들이 한창 어렸을 때, 육아에 지친 나를 보며 어른들은 말했다. 품 안의 자식일 때가 좋았다고.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고. 하지만 나는 내 품을 떠나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자녀들의 모습을 언제나 고대하고 희망한다. 육아가 싫어서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엄마가 되고 싶었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나에게 가장 가치로운 일이다. 내 바람은 아이들이 한 사람의 건강한 어른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몸만 큰 게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같이 균형 있게 자란 어른 말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내 품 안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우리가 다시 만날 때 내 품 안에 안을 수 있는, 또는 내가 아이들의 품 안에 안길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니까.
같은 날, 같은 시간인데 하늘의 빛이 다르다. 이쪽은 비가 쏟아질 것 같다. 같은 날, 같은 시간인데 누군가의 하늘은 밝고 쨍쨍하며 누군가의 하늘은 어둡고 암울할 때가 있다. 그게 우리의 삶이니까. 아이러니는 밝음 가운데 어두움을 보는 이가 있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을 보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전망대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본다. 어두움 가운데서도 밝음이 강하게 보인다.
오늘은 나무 밑이 아니라 나무들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