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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에 부서지지 않기

협재 가는 길

by 조은영 GoodSpirit

협재해변에 가기 위해 버스 노선 안내 전광판을 보고 있다. 대기 시간을 확인할 수 있어 아주 유용하다. 202번 버스가 7분 후, 도착인데 '만차'라고 뜬다. 여러 번 버스를 기다리면서 처음 보는 말이라 현지인으로 보이는 60대 여성분게 여쭈었다.

"버스가 '만차'면 멈추지 않고 가는 거예요?"

"그래? 여태껏 '만차'는 본 적이 없는데, 나도 그거 타는데. 버스기사가 '만차'라고 켜놓고 밥 먹으러 가나?"라며 전광판을 살피러 앉은 몸을 일으킨다. 보통 잘 모르는 상황이면 '모르겠어요.' 한 마디로 끝나는데, 줄줄이 이어지는 대답들을 통해 그녀의 열린 마음이 훤히 드러난다. 나는 호기심으로 다른 질문들을 이어갔고 그녀는 오픈북처럼 줄줄 자신의 삶을 읊어주었다.

결국 여행객을 가득 태운 만차버스는 지나가고 다음 버스를 탔다. 그리고 그녀가 한림에 있는 미용실에 머리 하러 가기 위해 나보다 몇 정거장 앞서 내리기 전까지 우리의 대화는 계속 됐다. 낯선 여행자에게 자신의 삶을 풀어내는 그녀는 즐거웠고 나 역시 한 사람의 삶을 짧은 시간에 살며시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윤숙씨는 나이 40에 처음 제주에 왔다. 첫눈에 반한 제주에 살고 싶어 남편을 졸라서 해마다 여행을 오던 그녀는 애월에 있는 고모님의 별장에 몇 주씩 머무르기를 반복하다가 경비가 만만치 않아 제주에서 추어탕집을 차렸다. 돈의 눈치를 보지 않는 떳떳한 체류를 위한 돈벌이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제주살이. 제주 이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혈압으로 쓰러진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식당을 하며 영국에 유학 중이던 딸아이의 학비를 벌어 학업을 마치게 해 준 것이 가장 큰 자랑거리다. 44세에 사별한 그녀는 20여 년을 홀로 지냈지만 딸이나 조카들이 자주 놀러 오면 같이 맛집 투어도 하고 운전 잘하는 친구가 있어 여기저기 심심찮게 돌아다니며 즐겁게 살아간다고 한다.

결혼이 마음에 없는 딸에게 한 번씩 싱겁게 "결혼은?"하고 물으면 "엄마나 해라."라고 화답하는 딸. "조카도 그렇고 요즘 애들은 인생을 즐기며 사니까." 성글성글 웃는 얼굴로 얘기하는 윤숙씨. 윤숙씨에게 나도 묻는다.

"요즘 애라면 결혼하실 거예요?"

"아니! 나도 인생을 즐기며 살 거야. 하하."

그녀에게 남편의 부재는 분명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있다가 떠나버린 남편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다면, 비혼이었다면... 어쩌면 삶의 무게가 더 가벼웠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대답이 이해가 간다. 마흔넷에 사별하고 혼자 타지에서 식당을 하며 유학 중인 딸을 뒷바라지하는 게 얼마나 벅찼을까. 혈혈단신이었다면 오히려 삶은 쉽게 흘렀으리라.


그런데 한편으론,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결혼을 안 했을 거라는, 강한 부정의 대답이, 강한 긍정으로 해석되는 것은 나뿐일까? 수많은 파도에도 부서지지 않은 그녀의 꿋꿋함이 나의 하루를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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