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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날의 협재

바당은 바당이주게

by 조은영 GoodSpirit

제주에 오면 언제나 협재를 찾는다. 협재를 처음 만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하던 해의 6월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위에 얇게 출렁이는 비췻빛 바다. 처음으로 바다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던 순간이다. 그때부터 협재가 좋았다. 2024년에 다시 만난 협재는, 22년 만에 찾아온 협재는 아니지만, 오늘만의 색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바람이 몹시도 강렬해서 고운 모래가 공기 중에 날릴 정도다. 그럼에도 날은 더없이 쾌청하고 맑다.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가 모랫바람이 심해서 장소를 바꿨다. 울퉁불퉁한 갯바위 위에 돗자리를 엉덩이 크기만큼 접어서 깔고 앉아 음악을 들으며 어제 샤려니숲길에서 쓴 시 <섬, 아벨>을 다듬는다.

10월인데도 백사장에서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즐기는 외국인들. 보트를 타는 사람들. 수영을 하거나 스노클링을 하는 젊은이들, 모래사장에서 노는 어린이들, 패러 글라이딩을 하며 낙하하는 사람들, 바위 위에 서서 포즈를 잡으며 사진 찍는 사람들, 자리 펴고 글 쓰는 1인까지, 그들 사이사이로 바람은 세차게 모래를 실어 나르고 그들의 소리는 모래알과 뒤섞어 묻힌다. 내 삶에 수차례 있었던 협재의 날들 가운데 노골적인 모래알들의 비행을 피부로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마치 사막지대에 와있는 듯한 이 낯설고 새로운 느낌. 그러나 작열하는 태양이 아니라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의 따스함과 오아시스와 같은 바다가 옆에 있어 오감에 육감까지 깨워 활발하게 감각한다.

협재 바다 너머에 작은 섬이 보인다. 이 사진을 찍는 시점에는 저 섬이 비양도인 것을 몰랐다. 그리고 내일 저 섬에 혼자 배를 타고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평소에 나는 시간 단위로 움직이는 시간강사이다 보니, 적어도 가까운 1주일은 아주 촘촘하게, 한 달은 다른 계획을 짬짬이 넣을 정도로 약간 성글게, 1년은 정규적으로 하는 수업과 강의를 대략 짜놓는 편이다. 난데없이 어떤 일이 훅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벗어난 나 홀로 여행에서 나 하나만 챙기면 되다 보니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도 되었다. 그 해방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바람에 일렁이는 투명한 바닷물결
바람이 빚어낸 고운 모래결
바람에 쏠린 야자나무 잎결
바람이 흩은 분방한 머릿결

바람이 만들어낸 다양한 결들, 모양도 색깔도 질감도 성질도 다 다른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물결과 모랫결이 비슷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나무 잎결과 나의 머릿결이 비슷한 모양새다. 전혀 다른 물성이지만 입자의 모양이 비슷한 것끼리 비슷한 형태를 이룬다. 오늘 협재에서는 그 무엇도 바람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아무런 형태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바위와 내 발가락도 실은 바람을 타고 온 모래가 달라붙거나 갈라진 틈 사이로 파고든다. 그런데 이 모든 게 하나도 싫지 않다. 싫을 이유가 있나? 마냥 좋다. 우리는 모두 이 순간 바람의 영향권에 있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는 화만초 압테니아, 이 꽃의 씨앗도 바람이 실어왔을까?

이름을 알 수 없는 죽은 물고기. 누군가 모래를 꾹꾹 눌러 그려놓은 것 같은 막대기의 형태. 작살로 잡은 물고기를 연상한 걸까? 천장에 매달아 놓은 자린고비의 굴비처럼 걸어 매달아 놓은 형상일까? 신기하게도 젖은 백사장에 누운 물고기는 부패가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눈부신 순간에도 죽음은 목격된다. 아이러니하다. 죽음은 어둡고 음습할 것만 같았는데 어쩜 이렇게 빛과 어울릴까? 나는 생각한다. 나의 죽음의 날도 음습하지 않고 이렇게 눈부셨으면. 빛과 이렇게 잘 어울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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