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주는 가게
금능은 협재보다 아기자기해 보인다.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골목을 누비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돌담 사이로 출입문이 보이고 언덕처럼 솟은 초록 잔디가 보인다. 저 집에는 어떤 이가 살고 있을까?
입구 오른편에 구멍 셋 뚫린 정주석이 보인다. 그런데 정낭은 보이지 않는다.
손님맞이하듯 마주 보고 있는 저 앞 벤치에 앉아보고 싶은데 나만 그런 건 아니었던지... 벤치 등받이에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쓰여있다. 그걸 보고도 들어갈 뻔뻔함이 부족하여 아쉽지만 사진 한 장을 찍고 마음으로만 마음껏 앉아 본다.
출입문 정주석에 빠져있던 정낭에 대해 다음에서 검색하여 알게 된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정주석에 3개의 구멍을 뚫고 기다란 나무막대인 정낭을 끼우는 것은 제주만의 특별한 풍습으로 고려 때부터 시행되었다고 한다. 소나 말의 출입을 막으면서 동시에 집주인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언제 돌아오는지까지 이웃에게 알리는 소통방식이다.
이를 보면 이웃 간 왕래가 얼마큼 빈번했는지 추리해 볼 수 있다. 집에 있는 경우 왼편의 정낭은 모두 빼놓은 걸 보면 서로 간 얼마나 쉽게 빗장을 풀고 맞이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금방 돌아올 때는 왼쪽 정낭을 하나만 끼우기 때문에 쉽게 넘어 들어가 마루에라도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날 내부를 전혀 볼 수 없는 데다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있는 철제 현관문과는 대조된다. 그런 문에 익숙해질수록 갑자기 집에 찾아오는 손님과의 대면식 소통은 더욱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잠금장치가 없는 제주평강은 정낭과 같은 맥락으로 이번 여행에서 내가 사람들을 더 쉽게 받아들이고 소통하게 만드는 데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빗장 풀린 나는언제 어디서 누구와라도 얘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바다를 향한 돌담에 걸터앉아 발 아래 파도를 느끼며 음악을 듣는다. 떠오르는 생각을 적으려고 공책을 펼치는 순간, 사이에 끼워두었던 팽나무 그림 수채화가 바람에 날아가버린다. 아! '나무 대신 바다를 그릴 걸'하고 후회했던 팽나무는 바람과 함께 바다로 날아가 버렸다. 그림도 나처럼 마음 닿는 대로 가고싶은 모양이다.
비양도가 보인다.
금능의 골목을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작은 소품가게를 만난다. 여행을 오면 으레 기념품가게에 들르는데 거의 실패가 없는 초콜릿을 산다. 누구에게나 쉽게 건넬 수 있고 취향을 생각하며 세심하게 마음 쓸 필요가 없어 좋다. 가게에 들어서자 주인이 상냥하게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나도 반갑게 대꾸한다. 내부가 아주 협소한데 간식들과 작은 기념품들을 벽면까지 아기자기하게 배치를 해서 물건들이 쉽게 눈에 띄어 좋았다. 계산대 가까이에 있는 구아버차에 대해 묻자 풍미며 효능에 대해 쉽게 설명해 준다. 그리고 감귤쫀드기를 먹어보라고 권한다. 아이들이 가끔 쫀드기를 먹는 걸 봐서 쫀드기도 몇 개 담았더니 감귤쫀드기 새 상품을 덤으로 담아준다. 제주 감귤과 우도 땅콩으로 만든 초콜릿을 더 챙기고 왼편에 난 작은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간다. 그렇다고 2층은 아니고 입구층보다 살짝 높은 지대이다. 건축의 구조가 독특하다.
그곳엔 마치 손뜨개를 한 것 같은 여러 색상의 가방들이 있다. 파란색 가방에 마음이 간다. 이번 여행에 나에게 주는 선물로 즉석 구매 결정을 하였다. 가격이 2만 원대로 무척 저렴했다. 그렇다고 충동구매는 아니다. 그리고 갈색 가죽 커버를 씌운 일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일지를 보자마자 아벨이 떠올랐다. 아벨이라면 유용하게 사용할 것 같다. 가방과 일지, 구아버차, 각종 초콜릿들, 쫀드기를 내밀자 주인은 나에게 꿀쫀드기와 선글라스를 낀 귀여운 하루방도 덤으로 준다. 이렇게 덤을 툭툭 담아주는 기념품 가게는 처음 본다. 보통 기념품가게는 뜨내기손님들에게 가격을 깎아주거나 덤을 주는 일이 드문데 아무 말 안 해도 이렇게 알아서 뭔가를 주는 가게는 처음이다.
금능소품 주인의 호의에서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의 모습이 보인다. 도쿄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어차피 또 더러워질 건데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동료의 핀잔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공중화장실을 깨끗하게 닦는다. 그 화장실의 이용객이라면 누구라도 그날의 하루가 그 화장실 덕분에 더 나아질 수 있다면 됐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가 조금은 더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처럼. 금능소품의 주인이 내게 베풀어준 호의는 그와 비슷하다. 그녀는 앞으로 또 볼 일이 거의 없을 여행객의 하루가 더 나은 하루가 되도록 함으로써 그렇게 자신의 하루도 더 나은 하루가 되게 하는 또 한 명의 히라야마라는 생각이 든다.
금능소품 출입문 옆 커튼에 <Life is better at the beach>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해변에서의 삶은 진정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햇살 좋은 날에는 바다의 너그러움에 감사하고 폭풍우 치는 날에는 바다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겸허해질 테니까.
So the life is better at the be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