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일상에서 살아남기
편견 없이 사람을 바라본다... 그건 너무 어려운 것 같다. 우린 조금이라도 달라도 눈에 그 다른 점이 딱 와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른 점에 의해 색안경을 끼며 그 부분을 오히려 끄집어내며 '넌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해? 원래는 이게 맞지 않아?'라고 하며 오히려 자신이 틀렸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상처를 입든 안 입든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은 세상 옳다는 식이 대부분이다. 그럼 사람들은 대부분 지적을 당한 사람보다는 지적을 한 사람을 안 좋게 보는 경우들도 있다. '뭐, 별거 아닌데... 왜 저런 식으로 말하지?'처럼 말이다. 그럼 이때 지적을 당한 사람이 옳을까? 아니면 지적을 한 사람이 옳을까? 그것도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을 한 게 맞을까?
화자가 봤을 때는 셋 다 옳을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그 사람의 말을 하는 전하는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지적 당한 사람이 동물 학대범을 옹호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지적을 한 사람이 방식이 잘 못 되었을 수 있지만, 옳은 지적을 했을 수 있다. 동물을 키우거나 애정하는 사람들 거의 다 그 사람을 지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우리는 하나의 편견이 생기게 된다. '저 사람은 동물 학대범을 옹호를 했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되던가 아니면 편견을 가지고 더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한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가 오히려 싸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라는 속담처럼 그냥 그 사람을 피하게 된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화자도 동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동물 학대 옹호론자들 보면 화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자가 말을 하고 싶은 편견은 예를 들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동물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문제들에서 화자는 '과하지 않는 선에서의 관심과 애정을 가지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고 용기를 내어 자신들의 상황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바라고 있지도 않는데 도움을 주게 되면 그들이 막상 혼자서 이 세상에 살아가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죽고 싶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럴 땐 우리의 도움은 '기다림'이지 않을까? 그들이 그들의 인생에 적응을 할 기다림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사소한 도움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