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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비 Apr 25. 2023

빈말

내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는, 어째서 할머니들은 거의 모든 젊은 남자들을 잘생겼다고 칭찬하는가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몇 위대한 인물들처럼 할머니와 함께 자랐는데, 그러다보니 할머니들을 만날 기회도 많았다. 하춘화는 다섯 살에 데뷔했다고 한다. 나도 거의 그 나이 때부터 각자의 방식대로 기나긴 인생과의 싸움에서 이겨온 여인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면서 커왔다. 공연이 끝나면 차마 말 못할 방식으로 귀여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유감은 없다.


그녀들은 내게 용돈과 먹을 것을 챙겨주었고, 항상 내게 듣기 좋은 얘기들을 해주었다. 그 중 하나는 잘생겼다는 얘기였다. 그녀들의 표현으로 치환하자면 ‘인물이 좋다’였다. 그녀들이 말하기를 내가 훗날 장가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난 그렇게 믿고 살았다.


하지만 학창시절을 보내며 내 머릿속엔 점차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내가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해보고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피부 말간 놈들이 여자친구와 데이트 한다고 자리를 비운 교실에서 나만큼 시커먼 놈들끼리 모여 여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여자에게 잘생겼다는 얘기를 들은 경험이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별 희한하게 생긴 놈들도 그런 말을 들은 경험이 있었고, 그 중 절대다수가 중년 이상의 여성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진하게 생긴 놈, 흐릿하게 생긴 놈, 코가 구부러진 놈, 턱이 두 개인 놈 전부.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삿대질을 해가며 나중에 지옥에 가서 혀가 잘리고 싶지 않으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철저한 심문 끝에 모두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60대 이상의 여성에게 받은 칭찬은 논외가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들이 벤자민 버튼처럼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젊은 시절을 거쳤을 것이고, 당연히 남자의 외모를 보는 자신만의 기준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녀가 남진을 좋아할지 나훈아를 좋아할지 아니면 둘 다 안 좋아할지 판단하던 그 기준 말이다. 그랬던 그녀들이 어째서 이런 얼굴들까지 ‘잘생김’의 범위에 포함시켜주게 된 것인가?


비록 나이를 먹으며 취향이 변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나이를 먹었더니 등산이 좋더라, 나이를 먹었더니 청국장이 좋더라, 브람스가 좋더라,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자아를 잃을 정도까지 변하지는 않는다.


할머니들 중에서도 눈 화장이 짙고, 끽연을 즐기시는 분들은 외모 칭찬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내 친구 중 한명은 심지어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는 편의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담배를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내 친구 눈 밑의 점을 가리키더니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너의 그 눈물점, 참 안 좋은 거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발발 떨었다. 나도 눈물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도 있는 걸로 봐서, 나이가 먹더라도 외모에서 흠을 찾아내는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심지어 더 풍성해지는 것 같다.


사실 짐작 가는 바가 몇 개 있긴 한데, 그것들의 핵심은 사실 할머니들의 말이 모두 ‘빈말’이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할머니께 진지하게 이것에 대해 여쭤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자니 또, 혹시라도 할머니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시며 “너도 이제 진실을 알 나이가 되었구나.”라며 운을 띄우실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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