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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Sep 10. 2023

뚝방길 아래 우리집

언니를 실은 운구차가 봉덕 시장을 지나 중동교로 올라설 때, 버스 안에 있던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따로 아무런 얘기가 없었는데 기사님은 희안하게 대명동을 거쳐 봉덕동으로 향했다.

마치 언니가 어린 시절 우리들의 을 하나, 둘씩 지나쳐 가고 싶었던 것 마냥. 


중동교 위에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돌아다보면 어린 시절 우리가 살던 뚝방길 위의 우리집이 있었다. 지금은 집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휑한 길에 자동차들이 쌩쌩 달려갈 뿐이지만, 나는 또렷히 우리집의 형태를 그려 나갈 수가 있다.


녹이 슨 붉은 대문을 밀고 뚝방 아래로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키가 큰 우리 아빠는 허리를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던, 얇은 골판지같은 나무 문을 열면 언니들의 방이 바로 보인다. 창문이 하나도 없던 언니들의 어둡던 방 안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 왔다. 

그 방에서 언니는 사춘기를 보냈다. 어둡고 축축한 그 방에서 언니는 어른이 되어갔다.

우리들은 그렇게 우리들만 알 수 있는 시련과 아픔을 함께 견뎌왔다.  그렇게 가난하고 서럽던 시간들 속에서도 우리들은 함께여서 때로는 웃기도 하고 너무 사소하지만 소중한 행복을 나누기도 했었다.

우리들 외에는 누구도 오롯이 공감할 수 없는 그 시간을 함께한 우리들 중에 한 자리가 쏙 빠져나간 공허함은 그 어떤 서러운 가난과 시련보다 더 아프다.




언니들은 마당에 연탄 두 개를 이어 넣은 연탄 난로 위에다가 큰 냄비를 올려서 카레라이스와 하이라이스를 만들었다. 학교 가사실습에서 배웠다며 낯선 음식들을 만들어 내어놓으면 오빠와 나는 그냥 이유없이 신이 나서 머라도 심부름을 시켜주기만을 기다렸다. 저녁이 되서 아빠, 엄마가 돌아오면 언니들이 만든 카레에 밥을 비벼 먹으며 우리 여섯 식구는 정말 행복했다.


무더운 여름 날에는 아직 해가 기울지도 않은 초저녁부터 아빠는 대자리를 들고 뚝방 위로 나갔다. 그러면 엄마는 커다란 수박과 쟁반을 챙겨 따라 나와서 수박을 썬다. 오빠랑 나는 베개까지 챙겨들고 대문앞 뚝방길 대자리 위에 자리 잡는다. 아빠의 부채질 아래서 우리들은 여름 밤이 깊도록 쉴새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무덥던 여름 밤의 공기도 흩날리는 버드나무 잎의 사라락사라락 소리에 흩어지며 잠이 들었다.


매월 5일이 되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시장 안 통닭집으로 가서 통닭을 두 마리 시켜놓고 나를 뜨뜻한 아랫목에 앉힌다. 엄마가 장을 볼 동안에 나는 커다란 가마솥에서 닭들이 튀겨지는 모습을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다. 아빠의 월급 날이었던 매달 5일은 아직도 가끔씩 누런 봉투에 싸여진 바싹한 통닭을 둘러 앉아 나눠 먹던 기억에 까닭 없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는 중학생이던 작은 언니가 친구집에서 하루인가 이틀을 자고 집에 들어 오지 않은 가출을 했다. 언니가 집에 들어 오던 날, 아빠는 대문 앞에서부터 '진이 왔냐?' 고 소리를 지르며 언니들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무서운 모습으로 회초리같은 것을 찾다가 마땅치 않자, 아빠는 본인의 허리띠를 풀어서 이불 밑에 숨어 있던 작은 언니를 때렸다. 우리에게 큰 소리도 한 번 안 지르던 아빠가 그렇게 화를 내고 무서웠던 모습은 처음이어서, 또 그것이 마지막이어서 나는 말리지도 못하고 바라보던 아빠의 그 뒷모습이 한참을 잊혀지지가 않았다.

 

아빠는 큰언니, 오빠, 나에게는 '누구야~'하고 이름을 불렀는데 유독 작은언니에게는 아빠만의 별명을 불렀다. 어릴 적에 우리 남매 중에 젤 마르고 약해서 잔병치레가 많았던 작은 언니에게 아빠는 희안하게도 늘 '꽃돼지'라고 불렀다. 

작은 언니가 '왜 나만 돼지냐'고 툴툴거리면,

아빠는 항상 웃으면서

"니가 젤 예쁘니까 꽃돼지지. 막냉이 저거는 울보라서 똥돼지고." 했다.


그런 아빠 마음을 작은언니는 알았는가.

한 번씩, 엄마가 아빠에게 화가 나서 더는 못 살겠다며 보따리를 싸서 서울에 사는 외삼촌네에 가겠다고 나서면, 큰언니, 오빠, 또 막냉이인 나는 얼른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희안하게 작은 언니는 혼자서 자기 짐을 꺼내 놓으면서,

"우리 다 엄마 따라가면 그럼, 아빠는 혼자서 어떻게 살아? 내가 그냥 아빠랑 살게." 하면서 울었단다.

그러는 둘째가 눈에 밟혀서 엄마는 외갓집가는 발걸음을 돌려 보따리를 다시 풀곤 했단다.




엄마가 벽에다 붙여 놓고 자랑스러워 하던 우리들의 통신표와 상장들, 해마다 문살에 그어 놓은 우리들의 키재기 눈금들, 아빠랑 오빠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마저 두던 바둑판처럼 우리들은 모두 다 뚝방길 아래 우리집에 남아 있다.

도로가 깔리고 집터는 사라졌지만 뚝방길 아래 우리집에서 울고 웃던 우리들의 기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더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를 잊을 수가 없듯이 우리들은 기억속에 어릴 적의 그때는 그대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려고 작은 언니의 운구차는 지금 중동교를 건너 뚝방길아래 우리집을 지나있나 보다.


언니도 그때가 생각이 나니?

언니는 그때가 어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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