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은 진짜다

by 이방인 일기

정신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없이 가방에 노트북과 공책, 펜, 충전기 등등을 챙기고 고양이 세수를 한다. 저녁에 미리 도시락 준비를 안 해둬서 오늘은 도시락이 없다. 같이 나가려고 졸졸 따라오며 야옹야옹 울어대는 회색 고양이를 뒤로 하고 얼른 문을 닫았다.


사무실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 오늘은 도서관에서 일을 한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면 차로 출근하는 남자친구가 나를 도서관에 내려주고 본인은 본인 회사로 가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도로 공사를 하는 네덜란드 탓에 돌아돌아 가느라 남자친구는 오늘도 지각하게 생겼다. 도서관 앞 주차장에 도착하고, 남자친구 눈치를 쓱 보고 후다닥 차에서 내린다.


바로 앞에 붉은 벽돌 도서관이 보인다. 왠지 모르겠지만 네덜란드 도서관들은 다 비슷하게 붉은 벽돌로 지어놨다. 도서관 입구로 걸어가는 길 오늘도 안개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목구멍 시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람은 불고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다. 자전거 타고 다니는 사람 한두 명이 보인다. 북유럽은 한국과는 다른 느낌의 추운 날씨가 있다. 습한 건 아니지만 항상 공기에 물줄기가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한국 겨울은 그래도 하늘은 푸른 날이 많은데 북유럽은 그렇지가 않아서 더 잿빛이고 더 겨울 같다. 우울 해지기 딱 좋다.


도서관 입구에 들어오면 느껴지는 따뜻한 공기가 오늘따라 아늑하다. 업무를 보고 있는 공무원들이 앉아있다. 네덜란드 도서관은 시청이랑 같이 붙어있는 경우가 있다.


커피냄새가 솔솔 난다. 도서관 가장 안쪽에 있는 커피머신으로 간다. 이 도서관에는 공짜 커피머신이 있다. 사실 이 커피머신에 "직원용"이라고 네덜란드어로 써져 있는걸 나중에 알았지만, 사람들이 한잔씩 홀짝홀짝 빼먹는 경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길래 나도 합류했다. 오늘도 4유로를 아끼게 해 준 머신에 감사한 마음이다.


카푸치노를 뽑아서 도서관 메인 홀로 다시 나간다. 오늘도 아침 일찍 도착해서 신문을 읽고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계신다. 그 옆에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쳐주는 자원봉사자 할아버지와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사람들 몇몇 테이블이 있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들을 풀고 와아피이도 연결하고, 도서관 자리마다 놓여있는 노란색 스탠드를 켜고 나면 일할 준비 완료다. 그렇게 오전 업무를 처리하고, 미팅룸을 예약해서 미팅을 몇 개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훌쩍 넘는다.


벌써 세시다. 점심을 먹긴 해야 하는데.. 영 입맛이 없다. 오늘은 유독 안 좋은 생각들만 들었다. 지금 내가 설정한 회사 방향에 자신이 없고. 하고 싶은 프로젝트는 많은데 너무 많은 리소스가 들어가는 건 아닐까, 내가 괜히 하자고 해서 팀원들 고생을 시키는 건 아닐까, 좀 더 나아가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등등 유독 비관적인 날이었다.


이렇게 밥때를 놓칠경우는 프로틴 드링크 하나 마시고 마는데 오늘은 너무너무 비관적인 생각들이 들어서 그냥 앉아있으면 뭐하나하는 생각에 카페테리아로 갔다. 루꼴라 빵. 닭가슴살 샌드위치. 오렌지 주스. 네덜란드 음식은 진짜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없는 입맛을 더 떨어지게 하는 것도 능력이다. 계속 서성이니 뒤에 서있던 사람이 묻는다.

"맘에 드는 게 없나 봐요?"

"하하...."

저는 김치찌개에 밥 말아먹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서 짐을 다 챙겼다. 어차피 앉아있어 봤자 힘만 빠지고 밖에 나가서 걷다 보면 더 배고파질 것 같아서 도서관 옆에 있는 식당가로 갔다.


여기도 샌드위치 저기도 샌드위치여서 일단 뷔페식으로 밥이 있는 카페로 들어왔다. 다양한 샌드위치들이 있다.

" 뭐 도와드릴까요? 저희 종류가 많아요~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고.."

아저씨가 너무 친절하게 응대해 주셔서 그냥 아무 샌드위치를 골랐다. 뭐든 나한테는 그냥 대부분 비슷한 샌드위치다. 샌드위치만 먹으면 퍽퍽하니까 진한 초록색 생과일 주스도 골랐다. 항상 주스가 초록색이면 대충 만족스러운 맛이다. 계산대로 가니 아까 설명해 주던 친절한 아저씨가 웃고 기다리고 계신다. "11유로입니다~"

아니 샌드위치에 주스하난데.. 그래 도시락 안 싸 온 내가 죄인이다 하고 결제를 한다.


노트북 충전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안에 콩나물 같은 게 들어있어서 꽤 아삭아삭하다. 주스는 케일주스 같은 걸 골랐는데 이것도 괜찮았다 (믿고 먹는 초록색). 반쯤 먹었을 때였나? 밥 먹기 전 고민하던 부분들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일부러 생각하려고 했던건 아니다. 탄수화물이 들어가서 그런 건가? 내가 왜 그렇게 비관적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민하던 부분들에서 솔루션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처음이다. 밥심중요하다 중요하다 하던 사람들 말에 공감을 못했는데, 이렇게 머리가 맑아지면서 생각도 안하던 해결책이 자동으로 떠오르니 정말 밥심애 뭐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그냥 있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나는 남은 시간을 열심히 일을 하다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는 시간에 맞춰 나왔다. 남자친구에게는 "내가 배고파서 머리가 안 돌아갔는데 밥 먹고 나니 되더라"며 농담 식으로 얘기했지만 나한테는 손에 꼽는 특별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