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과 촬영
이틀 동안 연이어 비슷한 주제의 영화를 보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특히나 국적도 다르고 감독의 상황도 다른데 말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을 연상시키는 파나히의 신작 '노베어스'는 유독 씁쓸했다.
탄압으로 인해 이란에서 영화 촬영 금지 조치 및 징역을 살았던 파나이의 사정을 알아서가 아니다. 그런 그가 척박한 현실에서 선택했던 활로가 결국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는 엔딩으로 종결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터키 국경 근처라는 설정은 단순히 영화 촬영 현장뿐 아니라 법에 종속된 자신과 예술에 근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 진실에 근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오버랩이 된다. 즉 국경은 거대한 윤리의 선이자 육체의 한계점이다. 윤리는 아주 자연스레 왔다 갔다 하지만 육체의 한계는 자유와 예술을 향한 접근을 방해한다. 수많은 카메라라는 눈이 있지만 카메라의 한계는 자연스레 사람의 눈의 한계와 동일시되고 모든 한계는 카오스를 선사한다.
이 인식론의 한계인 영화 속에서 절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거울'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자신의 거울이 되어야 하니깐. 그 모든 것은 녹화되며, 과거가 된다. 현재성은 카메라로 인해 과거로 분리될 기회를 얻는다. 그 분리된 관거는 그 당시의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 준다. 이것은 파나히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감독은 계속 실패하고 한계에 봉착하며 이를 촬영한다. 그렇기에 이 녹화된 영상은 감독을 반추하는 거울이 된다. 이 행위에 자연스레 관객도 착석한다. 아니 촬영한다. 하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감독에게는 고역이다. 이것은 시시포스의 고뇌이다.
2023년 칸의 의외의 선택이었던 추락의 해부는 노베어스의 정반대 편으로부터 시작한다. 정확하게 나누어진 시선처리와 의도적인 상하 구분. 그리고 끝까지 위를 올려다보지 못하게 후드티를 입고 퇴장하는 학생. 시각을 거의 잃은 아들과 그런 그를 따르는 강아지. 모든 것은 치밀하다. 그리고 사람이 떨어져 죽는다. 오토 프레밍거의 작품으로 시작해 베르히만으로 거쳐 심각한 영화학 개론으로 빠지는 영화는 이상하게 스산하며 불쾌하고 서슬 퍼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 '노 베어스'에서 촬영 현장인 줄 알았던 현장이 맥북으로 보고 있던 파나히의 시선이었음을 깨닫는 번뜩이는 시퀀스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 영화도 아들을 심문하는 모니터 영상 너머의 형사의 얼굴이 오버랩이 된다. 그렇다면 두 영화는 똑같은 것일까?
법원에서 녹음된 부부의 대화를 들려준다면서 법정에 설치된 모니터가 프롬프터와 유사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스크립트에 따라 들려오는 대사들, 그리고 여기에 오버랩 되는 이미지인 녹음된 부부의 현장 시퀀스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봤던 현장들과 보지 못한 순간의 현장들을 음악, 도면, 진술, 대화록 등으로 분석한다. 이 분석하는 순간들은 겉에서는 사건의 분석임과 안에서는 동시에 우리가 러닝타임에 보았던 영화 내의 영상들의 분석이기도 하다. 이런 분석하는 장면들은 예술을 곱씹게 만드는 비평이나 리뷰처럼 보인다. 즉 부부 관계가 법청에서 예술로 뻗어가는 것이다.
이 분석을 해부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제목이 부검이 아니라 해부인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사인을 찾는 부검이 아니라 해부라고 정의하는 그 순간, 해부의 뜻을 다시 찾아야 한다. 해부는 죽어있는 것을 하나하나 분석함으로써 어떠한 성질과 기능이 있었는지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지향점의 차이에서 두 영화의 방법론이 달라진다. 노 베어스에서 중요한 것이 촬영이라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재현이다. 왜냐하면 '추락의 해부'는 과거를 재현함으로써 이것들이 끝난 가상의 생명이라고 가정하여 칼날을 들이대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소설가 부부의 단편적 대화로 시작해 재현으로 구성된 '예술'이라는 것으로 확장시키며 해부하기 시작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다만 노베어스와 달리 이 영화가 앞서 말했듯 불쾌하거나 서늘한 이유는 재현의 목적과 이를 논하는 방식이 단순히 획기적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장르로 시작했기 때문에 발생한 아킬레스건처럼 보이는데, 사실 영화는 산드라 휠러를 남성의 세계에 일부러 종속시키게 설정해 놓았다. 누가 봐도 아들의 의식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부부의 대화나 부자간의 대화는 언뜻 보면 관객이라는 배심원들을 위한 영상으로 보이지만 후반부 변호사와 더불어 아들과 똑같은 자세로 안기는 산드라 휠러의 자세로 인해 남근의 서사에 종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남편의 땅에서 불리한 변호를 해야 함에도 모국어인 독어를 단 한마디도 안 하는 만들며 그녀에게 끝까지 꼭대기 층에서 능동적으로 내려다보지도 못하게 한다. 이런 배경에는 양성애자이자 팜파탈, 그리고 헐리웃식 가족주의를 붕괴시킨 여성에 대한 공격성이 내포되어 있다.
장르를 탈피한 듯 보이지만 다시 장르의 세계로 들어가고 마는 이 영화는 법정 장르가 주는 '승리'의 쾌감보다 숨막히는 변론으로 무장하는 장르적 '재미'를 바탕으로 본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 법정 장르를 위해 구축해 놓은 내러티브 속에 산드라를 방치한다. (이 지점에서 팜파탈의 법적 몰락을 그린 빌리 와일더의 '검찰측 증인'이 생각나기도 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나는 산드라의 무기력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여기에 관객도 후순위로 밀려난다. 두 영화의 결과적인 차이는 장르가 아니라 쟁취하기 위해 버려진 것(혹은 패배한) 들에 대한 태도인 셈이다. 감독의 생각하에 모든 것들을 정교하게 만든 뒤 벌이는 해부학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중, 하지만 이와 달리 버려진 것들에 대한 고민이 전달되는 동행한 관객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