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당당함을 이용한 속내
당시 사람들이 마네를 싫어했던 건 그가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좀 수준 있는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고귀한 그림의 여주인공 자리에 화대를 받아가며 살아가는 창녀를 선택했다.
이 그림을 향해 사람들은 분노했고 포르노 취급을 했는데 그건 몸 파는 년(?) 주제에 관객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이 싫었기 때문이다. 어디 감히 창피한 줄 모르고 이렇게 당당하지?
그래서 실제로 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손에 쥐고 있던 물 잔을 던졌고 그림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좀 멀리 떨어진 위쪽 벽으로 옮겨졌다는 얘기도 있다.
지금도 어느 유명 연예인이 이런 포즈로 누드 사진을 찍었다 하면 큰 뉴스가 날만한 그림이긴 할 것이다. 벌거벗은 체 목에 초커를 두르고 손목에는 팔찌를 발에는 슬리퍼 구두를 신고 머리에는 꽃을 꽂아놓고 관객을 바라보며 왜 내가 벗은 게 어째서?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 여자 창피한 걸 모르는 거야 아님 미친 거야? 게다가 이런 여자한테 헷가닥 눈이 돈 남자들은 꽃배달을 시켜가며 환심을 산다. 오늘밤 뜨거운 잠자리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런 그림을 가장 먼저 여자 작가가 그렸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여자의 표정과 몸짓은 마네의 것과 달랐을까? 모를 일이다.
이 여자의 당당함은 왜 남자 작가의 손을 빌어서 완성되어야 했을까? 왜 작가는 하필 당당한 여자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창녀라는 직업의 여성을 선택했을까? 사실 이 그림은 여자의 당당함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성생활의 당당함을 표현한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만약 창녀라는 여성의 직업이 당당하고 창피한 것이 아니라고 당시 표현 되었다면, 지금 2024년에는 성접대만 하는 글로벌 국제 기업이 생겼어야 하지 않겠는가? 4대 보험과 Paid vacation, paid sick days, 401K 같은 것은 각종 혜택뿐만 아니라 상장되어 주식까지 남발할 수 있는 회사 말이다. 하지만 전 세계 그 어떤 회사도 성접대 전문으로 비즈니스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명함을 파고 접대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마네의 그림은 2024년에도 불편한 그림이다.
자유로운 섹스를 주제로 한 작품에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자유분방하고 당당하게 그려져야 했던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원하든 말든 상관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