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으로 빚은 술과 말씀 안주

분별력 없으면 그 배에서 못 내린다.

by MamaZ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말씀을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의 행동과 생각은 말씀에 의해 “정당화” 된다. 예를 들어 시편 79장 6절의 말씀처럼 “주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나라에 주의 분노를 쏟으소서”라는 구절을 보면 하나님을 내 구주라 칭하지 않는 자들에게 분노를 쏟는 건 성경 말씀이 허락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나의 행동과 분노와 폭력의 정당성을 곧 하나님의 분노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교묘하게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의 위험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씀 자체가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걸 인정하지 않고 나의 필요에 의해 사용될 때 결과는 너무나 잔혹하다. 그리고 그 잔혹함은 폭력이 된다.


특히나 리더들이 이런 식의 폭력을 사용할 때 나는 가장 두렵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향해서

정치인들이 국민을 향해서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선생이 학생을 향해서

사장이 직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그 뜻을 선포하고 이루고 계시다는 착각을 전한다면? 전혀 성경적이지 않고 전혀 신앙인적이지 않은 행동이 믿음에 근거한것이라 우긴다면? 조금이라도 우위한 위치에 서있는 자들이 약자들에게 행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신앙으로 말씀으로 포장된다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폭력은 내가 하나님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내 아래 두고 조수 부르듯이 말씀을 짜집기 한다. 하나님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기가 막힌 자만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세상의 가장 큰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무서워하면 그런 짓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감히 하나님을 내 발아래 두는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보쉬의 바보들의 배를 보면 딱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에만 집중한 나머지 배가 어디로 가는지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보인다. 먹고 놀고 즐겨 보세. 지금 당장 내게 주는 이익과 즐거움에 심취한 이들에게 목적은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뿐, 소중하고 가치 있고 아름다우며 옳고 선한 것에 대한 동경은 없다.


예수를 동급으로 혹은 진정한 조수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 내 마음대로 말씀을 해석한다.


성경 말씀을 할리우드 영화 대사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배가 산으로 가는지 우주로 가는지 관심조차 없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


그런 이들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의 끝없는 욕망으로 빚은 술을 마시며 성경을 안주로 삼는다.


그런 사람들을 가득 태운 저 배는 어디로 갈 것인가.

배 안에 있는 이들은 어찌 될 것인가.


난파되면 방법이 없다.

답이 없다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답 없는 삶을 살 수 없다.

목적 없는 삶을 살 수 없다.

예수가 이 땅에서 답 없이 목적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듯이 그 분을 주라고 믿는 우린 확고한 진리를 믿는다.


적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옳고 바르고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을 구분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이들은 저 배의 흐름에 몸을 싣지 않고 하나님의 이끄심에 몸을 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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