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첫 토요일, 아이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 정적이 고인다. 진눈깨비처럼 흩어지는 생각을, 노트북에 갈무리하고 집을 나섰다. 창밖의 해는 벌써 구름 뒤로 숨어, 오후 4시 30분, 겨울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간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자마자 마주친 풍경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정밀화였다. 팔순의 부모와 성인 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이내 엄마의 팔짱을 낀다. 예전엔 무심히 지나쳤을 풍경들이 이제는 자꾸만 발길을 잡는다. 사람을 보는 일이 두려울 때도 있으나, 결국 타인의 모습에서 나의 어제를 보고 내일의 나를 발견한다.
등촌역 뒤편, 계절이 이름을 지워버린 겨울나무 앞을 지난다. 꽃도 잎도 떨어졌지만, 스무 차례나 마주했던 저 나무들의 빛깔은 나이테처럼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현대자동차와 적십자사를 지나며 도시의 혈관을 짚어본다. 우리들의 운율이 여전히 창가에 고여 있을 법한 염창평생학습관은 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얼굴만 내놓은 채 검은 옷으로 추위를 여미고 걷는다. 인공폭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던 70년대 신혼부부들의 낭만을 생각하다, 3년 전 진짜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마주친 압도적인 물보라가 떠올랐다. 울음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매몰당했던 거대한 폭포 이후, 나는 한동안 여행이라는 동경병을 앓았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압도적인 물줄기 앞에서 2023.05.19
작은 나루께 다리라고도 불렀다는 양화교를 지나 성산대교로 향하는 길은 적막하다. 겨울은 모든 방치를 허용하는 계절인가. 보행로에 흩어진 낙엽과 마른 나뭇가지들이 혹독한 계절을 견뎌내고 있었다. 휑한 가지에 걸린 까치집을 보며 스마트폰의 줌을 당긴다. 한 나무에 네 개의 까치집. 까치들이 부지런히 날아든다. 아직 먼 연록의 계절을 위해 미리 집을 고치는 중일까.
설렘을 안고, 1977년 착공해 1980년 개통된 성산대교 앞에 선다. 아뿔싸! '2029년까지 성능보강, 보행로 폐쇄', 차가운 문구가 입간판에 찍혀 있다. 차들은 굉음을 내며 질주하지만, 사람이 걷는 길은 덜컥 멈춰 섰다. 고개 숙여 내려다보니 테라코타 빛 트러스 아치들이 반달 모양으로 이어져 있다. 그 위로 나의 이십 대가 겹쳐온다.
남단(영등포구 양평동)에서 바라본 성산대교
오빠 따라 외삼촌 댁에 가던 날, 다리 너머엔 은하수처럼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일렁이는 불빛이 밤의 경계를 지우고 있었다.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이 그리워 잠 못 이루던 밤. 언젠가는 이 다리를 걸어가 보리라는 맹랑한 생각도 했다.
외삼촌 집 서양식 계단이 강물 위에 물결친다. 그러나 이제 외삼촌은 요양원에 계시고, 외숙모는 세상에 없다. 밀려오는 감회가 묘하다. 발길은 차단벽에 묶였으나, 아치 아래 강물은 유유하다. 사람이 만든 길은 막혀도 자연의 길은 멈추는 법이 없다. 길이 1,410m 성산대교 보행을 여기서 접는다.
돌아오는 길, 안양천 위로 땅거미가 내린다. 육교 위에는 관리자의 이름들이 선명하다. 누군가의 이름을 걸고 이 길을 지키겠다는 다짐이 든든하다. 천변을 달리는 청춘들의 숨소리와 자전거 타는 아이 뒤를 따르는 젊은 아빠의 모습에서 이 나라의 건강한 태동을 느낀다.
목동의 높은 기둥에서 뿜어 나오는 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도로변, 어린나무들에 매달린 수액 주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스스로 일어서기까지는 지극한 돌봄이 필요한 법이다.
오늘 나의 마음을 채운 것은 갈대 빛 사유와 은빛 물결이었다.
그 흐름을 담고 돌아오는 길, 내 안에도 마르지 않는 강물 한줄기 흐를 수 있다면.
https://youtube.com/shorts/HiizOG_gWHI?si=N9tMzrpKfWY0rj8u
- 성산대교 성능보강 공사중, 남단 초입에서 -
#성산대교#아름다운한강#아름다운서울#한강다리#남단영등포구양화동#북단마포구망원동#김포국제공항#Seongsan Bridge#강서청소년회관#이서윤시낭송#Sh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