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강, 다리 순례 03
몇 해 전, 눈바람을 맞으며 성수대교를 건넌 적 있다. 그때의 기억을 징검다리 삼아 다시 다리를 걷는다. 첫 행선지는 집에서 가까운 양화대교로 정했다. 옛 양화진 나루터가 있던 곳. 이슬비가 내린다. 우산을 펼치기에도, 접기에도 마땅치 않은 날씨. 빗줄기가 굵어질까 잠시 하늘을 살폈으나, 이내 걷기에 적당한 운치를 즐기기로 했다.
걷는다는 것은 멈추지 않고 바라보는 일이다.
등촌역 정류장에서 602번 버스를 탔다. 세 정거장 뒤, 양화대교 위 카페 정류장에 내리자 흐린 한강이 얼굴을 가린 채 맞이한다. 다 읽지 못한 편지처럼, 오늘 같은 날은 미래보다 과거로 나를 더 데려간다. 자연은 서둘러 자리를 옮기지만, 남겨진 것들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리에서 우선 남단 계단으로 내려 가자, 강변 풍경이 시원하게 열린다. 빗속을 걷고 달리는 사람들, 강변은 늘 그런 활기로 가득하다. 자전거가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고, 마른 풀잎들은 겨울의 잔상을 붙들고 있다. 길이 1.1km의 거리, 20분 남짓한 시간. 숫자는 명료하나 몸에 남는 감각은 그렇지 않다. 다시 계단을 올라간다. 젖은 인도 옆으로 차들이 질주하고, 소음은 강물 위로 흩어진다. 난관 철책이 강을 가로막고 있어도 바람은 그 틈을 비켜 가지 않는다.
양화대교는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한강교이다. 1965년 제2한강교로 개통되었으나 1982년 신교로 착공하면서 양화대교라 불리기 시작했다. 양화(楊花)는 ‘버들꽃’을 뜻한다. 봄이면 꽃씨가 눈처럼 날리던 나루터였다. 배가 드나들 길을 내어주려 한쪽 상판을 들어 올린 아치는, 양화대교만이 가진 독특한 조형미가 되었다. 난간 사이로 흐르는 강물. 바람이 일궈낸 물결을 화면에 담는다.
장면을 기록하려는 마음은,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 멀리 무지개처럼 떠 있는 선유교 아치가 보인다. 프랑스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가 설계한 이 다리는 보폭을 옮길 때마다 미세한 흔들림이 전해진다. 구조가 허용한 유연한 움직임이다. 비어 있는 풍경은 오로지 비의 몫. 하지만 머지않아 파란 잔디 위로 연인들의 눈빛이 피어날 것이다.
북단 끝 계단을 내려가다 자전거를 어깨에 멘 사람과 마주쳤다. 편리를 유보해야 통과할 수 있는 장소. 영차 하는 숨소리가 섞인 이런 불편함이 도시에서는 되레 정겹다. 당산철교로 진입하는 2호선 전동차의 마찰음이 들려온다. 일상은 소리로 먼저 온다.
당산 철교 너머 바다색 돔이 얹어진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건물의 24개 기둥이 24절기를 나타낸다고 하니, 지금 소한(小寒)의 기둥 곁을 지나는 셈이다. 12·3 계엄의 상흔이 남은 곳. 위정자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지만, 이슬비 내리는 겨울 강가에서는 모든 것이 낮아진다. 강변 갈대 사이로 이름 모를 꽃 몇 송이가 추위 속에 피어 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존재하는 생명의 기척이다.
잠두봉 선착장 카페에는 천혜향 색에 가까운 전구들이 많았다.
흐린 날 불빛은 다정하고 운치 있다.
양화진 역사길 오르막을 20분쯤 걸어 절두산 순교성지에 닿았다. 한국인 최초의 수세자 이승훈 베드로의 기록을 읽고 양화나루 이정표 앞에 선다. 이곳은 병인양요의 보복이 불러온 아픈 현장이다. 성물점에서 촛불을 켜는 사람들과 수녀님의 미소가 스쳐간다. 나는 벽에 걸린 글자를 내려다볼 뿐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바라본다. 때로는 머무르는 일도 이해의 한 부분일 것이기에.
해가 기울 무렵, 합정역에서 5712번 버스를 타고 다시 양화대교를 건넌다. 아치형 선유교에는 불빛이 어른거린다. 창밖을 찍으려 카메라를 들었더니 유리창에 버스 안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 나온다. 얼떨결에 찍힌 단체 사진, 도시에서는 나만의 풍경을 온전히 갖기가 쉽지 않다.
어둠을 핑계로 다시 내리려던 망설임을 접는다. 지나쳐 가는 장면들도 내 기억의 일부가 될 테니까. 등촌역에 도착하며 나의 ‘첫 한강대교 걷기’가 끝났다. 가느다란 겨울비가 도시를 적신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실비가 버들꽃처럼 내 어깨에 내린다.
https://youtube.com/shorts/3uOug8lus0I?si=4riF4y6knjU-k3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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