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상식'이 '상식이 아닐때'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by JuD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내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주는 비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그거 있잖아, 지난번에 했던 거랑 비슷하게"라고만 해도 완벽한 결과물을 가져오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차갑습니다. 최근 두 분의 신규 입사자와 함께 일을 시작하며 저는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리더에게 '당연한 것'이 팀원에게는 '풀기 어려운 숙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요즘 제가 가장 깊이 고민하는 주제, 바로 '업무 지시의 정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단계: '의욕'이라는 엔진에 '방향'이라는 내비게이션 달아주기

열정 넘치는 8년 차 과장님과 일을 시작했을 때, 저는 내심 안심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경력직이니 알아서 잘해주실 거라 믿었죠. "이 프로젝트, 알아서 잘해주세요"라는 모호한 한마디가 화근이었습니다.


과장님은 정말 열심히 하셨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방대한 자료를 준비하셨죠. 하지만 결과물은 제가 생각한 방향과 전혀 달랐습니다. 의욕이 앞선 나머지, 우리가 집중해야 할 핵심 타깃을 놓치고 범위를 너무 넓게 잡으셨던 겁니다.


여기서 첫 번째 배움을 얻었습니다. 열정은 방향을 만나지 못하면 때로 낭비가 됩니다. "알아서 잘해주세요"라는 말은 리더의 방임일 뿐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을 숫자와 문자로 명확히 찍어주는 것, 그것이 리더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첫 번째입니다.


2단계: '스킬'이라는 꽃을 피우는 '디테일'의 밑거름

반면 1년 차 사원님은 요즘 세대답게 AI 툴 활용 능력이 눈부셨습니다. 복잡한 데이터 정리나 디자인 업무도 뚝딱 해치우더군요. 하지만 기술적인 역량이 뛰어나다고 해서 일의 맥락까지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근 PPT 제작을 요청하며 "기존 레이아웃은 유지하고 내용만 업데이트해 달라"라고 지시했습니다. 제 머릿속엔 '폰트와 간격까지 그대로'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죠. 하지만 결과물은 전혀 다른 템플릿에 담겨 돌아왔습니다. 폰트도, 간격도, 심지어 도형도 모두 바뀌었더라고요.


'당연히 알겠지'라는 생각은 리더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오만입니다. 도구(AI)가 좋아질수록 그 도구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더 섬세한 가이드가 필요해요. 업무의 허용 범위를 어디까지로 둘 것인지, 바뀌지 말아야 할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히 선을 그어주는 디테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3단계: 전략적 파트너를 만드는 '기록'과 '싱크'의 묘미

결국 저는 소통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를 팀원의 역량 탓으로 돌리는 순간, 조직의 성장은 멈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운 전략은 '지시의 명문화'입니다.


입으로 내뱉는 말은 공중에서 흩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작은 업무라도 다음 세 가지를 텍스트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업무의 목적: 이 일을 왜 하는가?

마감 기한과 우선순위: 언제까지,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가?

체크리스트: 반드시 포함되거나 변경되어선 안 되는 항목은 무엇인가?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고 중간중간 방향을 맞추는 '싱크(Sync)' 과정을 거치니, 신기하게도 오해가 줄어들었습니다. 팀원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쓰지 않게 되었고, 저는 결과물을 보고 당황하는 일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팀원을 전략적 파트너로 만드는 진짜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리더의 언어에는 '알아서 잘'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저 또한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aka. 알잘딱깔센)' 해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AI든 사람이든, 결국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리더의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정교한 업무 지시'더군요.


좋은 결과물은 팀원의 손끝에서 나오지만, 그 씨앗은 리더의 명확한 사고력에서 발생합니다. 팀원이 헤매고 있다면, 혹시 내 지시가 안개처럼 뿌옇지는 않았는지 먼저 돌아보려 합니다.


오늘도 저는 제 상식을 의심하며, 더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을 고릅니다. 팀원의 소중한 시간을 1분 1초라도 아껴주는 것, 그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배려라고 믿으니까요.


혹시 오늘 팀원에게 보낸 메시지에 '알아서 잘'이라는 마음이 숨어있지는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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