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은 Dec 07. 2023

96세 엄마와 싸나톨로지

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요양보호사 가족요양

96세인 우리 엄마는 요즘 자주 훌쩍인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울고,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훔친다. 나는 다른 일로 바쁠 때는 그냥 지나치고 싶지만 그래도 물어봐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묻는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생각나서 울어?"

"너는 내가 죽은 다음에 아무 후회도 안 해도 돼."

"왜에, 나도 하겠지. 후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아니야. 너는 이렇게 내 옆에서 죽을 때까지 날 보살펴 줬는데 후회할 게 없지. 나는 너무 못된 딸이었어. 우리 엄마가 암으로 고생하실 때 난 병시중 한번 해드리지 못했어. 돌아가실 때도 옆에 없었고... 저승에 가면 엄마는 나를 보기 싫어할 거야. 흐흑."

"에이, 부모가 자식을 외면하진 않지."


엄마는 당신 엄마뿐이 아니라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언니, 형부, 조카, 사촌 언니, 육촌 아저씨 등 100년 동안의 기억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 고마웠던, 혹은 미안했던 사람들, 마음 아프거나 후회스러운 일들을 끝없이 반복해서 떠올리고 곱씹으며 눈물을 흘린다.


몸의 근육들이 너무 허약해져서 엄마는 식사 때만 잠깐 거실에 나와 앉아 있다가 한 시간도 안 되어 침대에 눕곤 한다. 식사 때는 젓가락질을 잘 못해서 생선 같은 건 내가 발려 드려야 한다. 다행히 아직 입맛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발려놓은 생선살을 맛있게 집어먹다가도 눈이 벌게지며 숟가락을 놓는다.


"왜 그래, 엄마. 일단 밥은 다 먹고 울자, 응?"

"갓난아이 때 죽은 애가 생각나서 그래."

"나한테 언니였다는 애기?"

"응. 그 애가 우릴 보고, '어휴, 둘이 주거니 받거니 잘도 먹고 있네.' 그럴 거 같아."

"......"


엄마는 스물 하나에 첫 결혼을 했고 거기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 당시는 육이오 사변 중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백일도 안되었는데 남편은 동네의 다른 청년들과 주변 경계를 하러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밖에서는 더욱 흉흉한 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중공군까지 쳐들어와서 젊은 여자들을 겁탈하고 죽인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졌다. 엄마는 시댁 어른들의 등에 떠밀려 아기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큰집 동서들과 함께 허둥지둥 피란을 떠났다. 얼마 후 국군이 다시 북으로 치고 올라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 아이는 죽고 없었다. 시어머니가 말했다고 한다.


"애가 먹지도 못하고 했으니 죽었지, 뭐."


엄마는 그 얘기를 하며 더 이상 식사를 못하고 휴지로 눈물을 찍어냈다.


"애가 얼마나 젖이 먹고 싶고,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싶어. 지난밤에 그 애가 생각나서 한잠도 못 잤어."


나는 아기 얘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엄마처럼 슬프지 않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이 그 얘기를 여러 번 했다는 사실을 잊었고 그때마다 치밀던 자신의 슬픔도 잊어버려서, 그 얘기를 할 때마다 똑같은 심정이 되어 운다.


엄마를 가장 자주 울게 하는 건 자신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TV를 봐도 무슨 내용인지 못 알아듣고, 대화도 서로 말이 잘 안 통해서 하루 종일 나에게 옛 기억을 얘기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한다. 몸도 불편하니 그냥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거나 잠을 깨도 흐릿한 정신으로 과거를 더듬을 뿐이다. 그러니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삶을 견디기가 힘겹다. 빨리 죽고 싶은 것이다.


나는 엄마의 눈물 레퍼토리를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이젠 다 꿰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으으, 으으"

서둘러 엄마방으로 달려가 보니 또 훌쩍이고 있다.

"왜, 엄마, 뭐 불편한 거 있어?"

"아니. 흑"

"그럼, 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하아, 큰일 났네. 하루종일 옆방에 있는데도 이렇게 보고 싶어 울면, 엄마 저승 가서는 어쩌냐."

"그러니까. ... 너는 내가 죽은 다음에 한 30년, 애들하고 잘 살고 있어. 그럼 내가 데리러 올게. 그때 나한테 와야 해. 알았지?... 사람이 너무 오래 살면 안 좋아."

"알았어. 거기 가면 집이나 하나 마련해 놓아. 집이 없으니 불편하네. 우리 곧 이사 가야 해."


엄마하고는 죽음 이후에 대해 자주 얘기하지만 솔직히 나는 죽음 이후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없다고 단언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죽으면 지금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죽음을 기다리기 때문에 엄마의 현재 삶은 죽음에 당면한 순간만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 계속되고 있다.


엄마와 같은 상황이 되면 나도 엄마처럼 끝없이 과거만 반추하며 누워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삶의 끝 부분에서도 삶다운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엄마를 돌보면서 나는 이제부터라도 죽음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침대에 누워 살아야 하는 순간에도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가 없으므로 죽음도 없는 것이다. 그 순간까지 삶만이 계속되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여성기업확인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