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 / 보람일자리
무협 소설을 많이 봐서 그런가, 나는 다분히 건달 끼가 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최근 보람일자리로 근처 동네키움센터에 일하러 다니고 있는 중에 깨달았다.
키움센터에서 공동체 생활이라는 주제로 아이들에게 교육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교육이 끝날 즈음 강의 선생이 아이들에게 A4 용지 한 장씩을 나눠주었다. 종이에 쓰인 글을 보니 '함께한다는 것은 _____ 일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_____에 각자가 생각하는 말을 채워 넣으라는 것이었다.
종이를 받자마자 자신 있게 쓰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어휴, 뭐라고 쓰지?' 하면서 고심을 하고 있었다. 뒤쪽 자리에 있던 아이들이 강의실 뒤편에 서 있던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길을 보내왔다. 나와 다른 선생 한 명이 다가갔다. 나는 문득 농담이 하고 싶었다.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 중 평소 선생님들에게 말도 많이 하고 쾌활했던 3학년 여자아이가 있어서 그 아이에게 내가 말했다.
"함께 한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아이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이 참, 선생니임."
나는 킥킥 웃었다. 옆에 있던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어때?"
"좋아요, 좋아요."
아이가 탄성을 지르더니 종이 빈칸에 '마음을 나누는'이라고 쓰고는 번개처럼 강의 선생한테 제출하러 나갔다.
한 번은 초등 1~2학년 네 명이 학교 놀이를 같이 하자며 나를 끌고 갔다. 한 명이 앞에 나가 선생님 역할을 맡았고, 나와 두 명의 아이는 학생, 한 명은 학부모라며 다른 쪽에 앉았다. 선생 아이가 앞에 서서 한창 설교를 하니까 학생 역할을 하는 아이 두 명이 킥킥대며 떠들었다. 선생 아이가 말했다.
"오늘 수업은 전부 영어로 말하는 거예요."
2학년 여자아이는 예스, 하고 대답했지만 1학년 남자아이는 수선스럽게 다른 얘기를 했다. 선생님은 왜 영어로 안 하느냐는 말도 했다. 선생 역할 아이가 훈계를 했다. 물론 우리말로 했다.
"떠들면 벌을 받아야 해요."
2학년 아이와 나는 예스 하고 대답을 했지만 1학년 남자아이는 계속 떠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 아이에게 말했다.
"샷 더 마우스."
2학년 아이가 킥킥 웃었다. 나는 그 아이가 내 말을 알아들었나? 하고 살폈지만 알 수 없었다. 1학년 아이는 그냥 자기 말만 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정규직 선생이 서둘러 오더니 나를 잠깐 보자고 했다. 그 선생은 50플러스 보람일자리 인력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나를 한쪽 옆으로 데려가더니 말했다.
"샷 더 마우스 같은 말 하면 안 돼요."
"아, 입닥쳐 라고 하면 안 되는 거죠. 농담으로 한 건데 죄송합니다."
"농담이라 해도 아이들이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말하면 난리 나요."
"아, 네. 알았습니다. 죄송해요."
그때 더 멀리 있던 센터장이 황급하게 오더니 나에게 말했다.
"그 말은 욕이잖아요. 그런 말 하시면 안 되죠."
"아니, 뭐 욕을 하려던 건 아니고요."
"그건 욕이에요, 선생님."
센터장이 다른 쪽에 있는 아이들을 힐끗거리면서 울상을 짓길래 나는 내가 영어를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양 좀 더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 말이 욕인지는 몰랐어요. 진짜 죄송해요. 진짜로, 제가 그 말이 욕인지 몰랐어요. 조심할게요."
옆에 있던 정규직 선생이 센터장에게 걱정을 담은 소리로 작게 말했다.
"아이들이 일이 학년이어서 못 알아들은 거 같고요, 다른 아이들도 들은 것 같지는 않아요."
선생들이 다른 자리로 떠난 후 영어를 잘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샷 더 마우스가 완전 욕이냐? 그냥 좀 과격한 말이 아니고?"
"엄청 친한 사이에선 서로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분 나쁘지. 억양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생각해 보니 나는 마치 다 큰 나의 자식들과 농담하던 식으로 아이들을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분명히 교육 현장인데 나는 그걸 무시한 셈이었다. 앞으로 영어는 입도 뻥긋 말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 말고도 나는 말을 이곳 분위기에 맞추지 못하곤 했다. 간식으로 수박이 나가는 날이었다. 센터장이 수박을 네모로 썰어놓는 시범을 보였다. 센터장의 시범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다른 선생들은 수박을 다들 네모로 썰었기 때문이다. 옆에 서 있던 보람일자리 선생에게 내가 말했다.
"저번에 내가 삼각형으로 썰다가 망쳐서 지적받았잖아요."
센터장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지적이라뇨. 그런 게 아니죠. 뭘 그렇게까지..."
"아, 농담한 거예요. 죄송합니다."
나는 나의 말실수를 순간적으로 깨닫고 바로 사과를 했다. 사실 내가 지적받았다고 말한 이유는 수박카빙 마스터 자격증까지 있는 사람이 정작 아이들 수박 간식을 만들 때는 요령이 없다는 걸 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보람일자리 선생들이 나의 경력을 알기 때문에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센터장 입장에서는 나의 경력을 자세히 알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알았다 해도 보람일자리 인력이 자기 경력을 갖고 지금 이 상황을 개그로 만드는 것이 그녀에게 결코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적이라는 말이 지적질이라는 말을 연상시켰는지 모르겠다.
기존 정규직 선생들에게 아이들 교육에 관한 내 의견을 말했던 것도 돌이켜보니 주제넘은 짓이었다. 이곳에 오던 초기의 회의 시간이었다. 나는 정규직 선생님들이 하루종일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각종 '뭐뭐 하지 마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에 관해 좀 긍정적인 말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말했었다. 예를 들어 '뛰지 마라'보다는 '걸읍시다.' '큰소리 내지 마라.'보다는 '소리 좀 낮추자.' 식의 말을 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었다. 이곳에 관해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하라 해서 무심코 말했는데 실은 선을 넘는 말이었던 것 같다. 다른 선생들은 아무 말도 안 했었다.
학교 놀이는 아이들이 자주 하는 놀이다. 하루는 한 아이가 또 학교 놀이를 하자면서 나를 끌고 갔다. 아이는 나에게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물으니 수업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했다. 나에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보니까 종이에 '벌을 받는 이유 세 가지를 쓰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알았어. 하면서 내가 연필을 드는데 사무실에서 정규직 선생 한 명이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크게 말했다.
"선생님한테 그런 거 쓰라고 하면 안 돼요. 누가 너한테 벌 받는 이유를 쓰라고 하면 너는 기분 좋겠어? 아니지? 선생님도 싫어하셔."
어투가 훈계 식이어서 아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이가 말했다.
"그냥 학교 놀이 하는 거예요."
"아니, 안 돼요.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하세요. 그래. 칭찬받는 이유를 쓰라고 해라. 알았지?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놀이는 그 길로 끝나고 아이는 종일 삐친 상태가 되었다. 나중에 나는 그 선생에게 말했다.
"저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돼요. 선생님 놀이니까 선생님들이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한 건데,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이 역시 선을 넘는 말이었던 것 같다.
결국 여러 실수들의 끝이 다가왔다.
수요일은 보통 아이들이 오후 2시가 돼야 들어온다. 그래서 오후 1시에 출근하는 선생들은 한 시간 가까이 가만히 앉아 서로 일상적인 얘기들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난달 말, 그렇게 편안한 수요일 오후 1시였다. 보람일자리 선생이 나 포함 둘이 있었고 대학생 아르바이트 한 명이 함께 모여 앉아 조용조용 수다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그날 처음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온 대학생 한 명이 들어왔고 합석했다. 그 대학생이 말했다.
"한가하네요. 아이들이 아직 안 왔나 보죠?"
마침 나를 쳐다보며 말하길래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2시 가까이 돼야 아이들이 와요. 그때까지 그냥 노는 거죠."
보람일자리 다른 선생이 황급하게 말했다.
"아이, 선생님, 논다 그러면 안 되죠. 기다리는 것도 일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또 농담처럼 말했다.
"아, 노는 게 아니라 노동 강도가 낮은 시간이라는 말이죠."
우린 다 같이 웃었다. 나는 문득 내가 말실수를 했던 일들이 생각나서 그 얘기들을 했다. '함께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사례와 '샷 더 마우스' 얘기였다.
"귀찮은 일 사건은 선생님들이 몰라서 그냥 넘어갔는데 샷 더 마우스 때는 우리 관리하시는 샘과 센터장님까지 달려오셔서 지적을 받았잖아요. 진짜 창피했어요. 친구한테 전화해서 물어보고 그날 저녁에는 일기까지 썼잖아요."
대학생 선생 두 명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보람일자리 선생이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지적이 아니고 조언이요."
"아, 맞다. 조언을 들었죠. 여기 와서 처음 알았는데요 내가 굉장히 껄렁대는 사람 같아요. 엄연히 교육현장인데 저는 동네 마실 나온 할머니처럼 행동했던 것 같아서 반성 많이 했어요."
대학생들이 또 웃었다. 그때 저쪽 공간으로 관리 선생이 지나갔다. 나는 문득 걱정이 되어 말했다.
"근데 이런 얘기들도 하면 안 되는데 지금 이렇게 수다를 떠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아니나 다를까, 관리 선생이 나를 불렀다. 나는 '아이코, 이거 바로 부르네.' 하며 일어났다.
관리 선생은 사무실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주의를 주기 시작했다.
"선생님, 아까 하신 그런 말들은 그냥 간단히 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몇 번씩이나 말씀을 자꾸 하시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예? 제가 혹시 이전에도 아까 한 얘기들을 다른 선생님들한테 했었나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까 자꾸 말씀하셨잖아요."
"자꾸라니, 내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는 건가요?"
"두 번씩이나 하셨잖아요."
"나는 그냥 내가 영어를 몰라서 실수했다는 걸 얘기한 것뿐인데...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한 거는 문제없는데 두 번 얘기하는 건 문제라는 말씀인가요? 제가 무슨 말을 두 번 했다는 거죠?"
"그냥 그 얘기들을 너무 오래 하셨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일단 알았어요. 제가 생각을 좀 해 보고 시정하던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번에는 솔직히 기분이 상했다. 아이들도 없고 선생들은 멀뚱멀뚱 앉아 있고 적막하게 시간만 흐르길래, 내가 실수한 걸 갖고 서로 웃자고 조금 떠들었기로서니 그새 뽀로로 달려와서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지적을, 아니 주의를, 아니 조언을(이거나 저거나 그거나) 하나 싶었다.
오후 내내 가슴이 조이는 느낌이었다. 이 공간이 너무 답답했다. 아이들 간식 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 대상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다시 한가한 시간이 왔길래 관리 선생한테 가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저는 이곳에 안 맞는 사람 같네요. 우리 집 아이들이 가게를 시작할 예정이어서 그 준비도 도와야 하고 해서 그만뒀으면 해요."
그녀는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고민 하나 없이 대답했다.
"언제요?"
"가능하면 빠르게요. 이달 말이면 제일 좋을 거 같은데요."
"굳이 말일까지 채우시겠다면... 이틀 더 나오시면 되겠네요. 센터장님한테 보고해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아, 마치 내가 그만두겠다고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속으로 한탄했다.
'이런 바보 같은 멍청한 여자야. 그걸 이제야 알다니.'
보람일자리가 나에겐 망신일자리가 된 기분이었다. 나 자신이 창피해서 이 글을 브런치스토리에 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하지만 결국 공개하기로 했다. 앞으로 몇십 년이 될지 모르는 긴 세월 동안 주책바가지 노인네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실수들을 할 수 있는지 경각심을 갖기 위해서였다.
'경각심을 갖는 날 하루만이라도 묵언 수행을 하면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