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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Jul 22. 2024

엄마의 노환

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 / 요양보호사 가족 요양

97세인 엄마가 집안일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해진 것은 3년 전부터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즈음, 엄마는 금방 가실 것처럼 쇠약해졌었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고개를 5초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목 근육이 너무 소실됐기 때문이었다. 식사 양도 반으로 줄었고 내가 옆에 없으면 거의 먹지를 않았다. 자기 전에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숨이 가빠했다. 가끔 현실을 수십 년 전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장례식장을 알아보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엄마는 나아져 있었다. 어떤 계기로 좋아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당시 나는 엄마를 돌보느라 한동안 일을 못하고 있다가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할 수 없이 하루 세 시간씩 일하러 나갔었는데 엄마는 그 후 긴장을 해서인지 기력이 좋아지고 정신도 맑아졌었다.


그로부터 1년여간 엄마는 무사히 시간을 버텨냈다. 힘은 없어도 오래 사실 것만 같았다. 허리가 아파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는 못하지만 목을 가누지 못해서 고개를 툭 하고 떨어트리는 경우는 없었다. 몸의 경련도 한두 달에 한 번씩 숨이 가쁜 수준으로 완화됐다. 정신력도 순간적인 건망증은 심했지만 과거와 현재를 착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약 두 재를 지어먹은 것 외에 특별히 의과적 처방을 한 것은 없었다. 다만 식사만큼은 작은 양이지만 세끼를 꼭 챙겼다.


하지만 반년쯤 전부터 엄마는 다시 급격히 쇠약해졌다. 집안에서 걷는 것도 혼자서는 힘들어했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흔들렸다. 한때는 하루종일 눈물로 살았었다. 하도 울어서 눈가가 벌겋게 짓무를 정도였다. 그래서 엄마가 눈물을 흘리려고 폼을 잡으면 나는 바로 달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울지 마. 울지 마 엄마."

덕분에 하루종일 우는 일은 없어졌는데 정신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하루는 엄마가 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물었다.

"아줌마, 우리 딸 어디 갔어요?"

"딸? 여기 있잖아."

"으응?... 아아, 우리 딸이구나. 옆에 있었구나. 나는 우리 딸만 있으면 돼."

그 후로 세 번이나 나를 못 알아봤다. 이런 경우는 엄마의 정신이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가 있을 때인 것 같다.


그런데 엄마는 자신의 이런 노화 과정을 잘 모른다. 과거에 비해 정신력이 100분의 1로 떨어져 있는데 엄마는 자신이 아직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0분 안에 똑같은 질문을 열 번 이상 한다는 사실을 엄마는 모른다. 내가 여러 번 말해 줬지만 자신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내 말을 전적으로 믿지 못한다.


"아무래도 내가 금방 죽을 거 같지가 않아. 먹는 것도 잘 먹지, 정신도 이렇게 멀쩡하지. 어떻게 하니. 내가 너를 망치고 있는 것 같아. 친구 만나러 가서 엄마 걱정 때문에 오래 있지도 못하고 여행도 못 가고 미안해."

"엄마, 난 돈이 없어서 여행 못 가."

"애들이 가게 차리고 나면 네가 많이 도와줘야 할 텐데. 정 안 되면 나를 요양원에 갖다 놔."

"내가 말했지 엄마. 요양원은 내가 돈이 없어서 엄마 못 보낸다고. 조금만 버텨봐. 그리고 애들 가게 하면 요양보호사 부를 거야. 걱정 마."

엄마는 요양원에 가기 싫지만 딸을 편하게 해 주려면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아예 돈 때문에 못 보낸다고 잘라 말하고 만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대화를 계속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 달 전부터는 식사 때 자신이 지금 뭘 먹고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그전에는 음식을 먹으며 가끔 맛있다는 말도 했었는데 최근에는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에 넣고는 했다. 먹기 싫어도 내가 걱정할까 봐 그냥 입에 넣었다.


나도 엄마가 뭘 먹으면 잘 먹을지 가늠이 안 됐다. 그래서 한 번에 여러 음식을 꺼내 놓았다. 국 한 종류, 살만 발린 생선, 떡갈비나 닭고기, 계란 요리 하나, 두부 종류, 생야채나 샐러드, 나물, 젓갈, 김치류 등 열 가지씩 상에 올렸다. 엄마가 이가 안 좋으니 주로 씹기 편한 것 위주로 주욱 늘어놓았다.


어떤 날은 북어조림과 계란찜을 주로 먹고 어떤 날은 곰국과 게장만 먹었다. 게장을 좋아하는데 어느 날부터는 양념게장이 맵다고 뱉었다. 간장게장으로 바꿨다. 반 건조 가자미도 너무 딱딱해졌다. 평생 반 건조 생선들을 좋아했는데 최근에는 동태 전처럼 무른 흰 살 생선만 준비했다. 젓갈 종류 끝, 물김치와 백김치도 끝, 모든 나물 끝, 대부분의 음식들이 하나하나 식탁에서 배제 돼왔다.


한 달 전부터는 엄마가 반찬을 스스로 집어먹지를 않았다. 숟가락을 들고 밥만 뜬 채 반찬들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내가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 주면 겨우 입으로 숟가락을 가져가서는 멍한 얼굴로 음식을 우물우물 씹었다. 2년 전의 상황이 재현되는 듯했다. 하루는 눈을 거의 감은 채로 음식을 먹다가 느릿느릿 말을 했다.

"저 쪽에 바다가 출렁출렁하고 있네. 바다로 내려가야 하는데 바위들이 많아서 힘들어. 저 쪽에 내 친구들도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고... 아버지와 엄마도 있네. 엄마가 나보고 오래. 이젠 가야지... 너는 내가 가고 나면 애들이랑 잘 살아야 한다. 거기서 내가 내려다보면서 음, 잘 지내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게, 알았지?"

"알았어. 밥 조금만 더 먹어. 엄마, 엄마, 엄마! 밥 먹으라고."

멍하니 있는 엄마를 흔들어서 겨우 한 숟가락 더 먹였다. 엄마를 돌보는 일 중에서 식사 챙기기가 제일 힘들어졌다.


이주일 전부터 엄마는 등에 담이 결려서 움직이는 걸 더욱 힘들어했다. 하루종일 거의 누워만 지내다 보니 자주 담이 결리는데 이번에는 목에 가래까지 끓어서 무척 괴로워했다. 앉아 있을 때면 1분에 한 번씩 기침을 했다. 누우면 조금 나아지곤 했다. 단골 한의원에 가서 엄마의 상태를 말했다.


"담약을 일주일간 드셨는데 이번에는 낫지를 않네요. 기침할 때 담이 결려서 너무 괴로워하세요. 요즘에는 식사도 잘 못하세요. 음식맛도 모르시고 식사량도 줄고 걱정이에요."

"노환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사인을 보면 대개 다발성 장기 부전증으로 나와요.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장기 여러 곳이 한꺼번에 망가지는 거죠. 어머니도 그런 과정에 있는 걸로 보이고요, 일단은 폐가 나빠진 것 같네요. 원래 폐는 코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폐가 나빠지면 코의 기능에 문제가 생깁니다. 코의 기능이 나빠지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음식맛을  모르는 거예요. 입은 다섯 가지 맛을 느끼지만 실제의 음식 맛은 냄새를 통해 아는 것이거든요. 코를 막고 양파를 먹으면 사과인 줄 아는 거죠. 음식맛을 모른다는 건 폐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약을 드셨는데도 담이 안 낳는 문제는, 어쩌면 가래를 뱉느라고 등에 힘을 자꾸 주니까 쉽사리 낫지 않는 것일 수 있어요. 정확한 원인은 진맥을 짚어봐야 알 수 있으니까 한번 모시고 나오세요."


엄마는 나보다 키가 크고 덩치도 커서 나 혼자서는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갈 수 없다. 그래서 아들에게 집에 한번 와야겠다고 부탁해 놓고 엄마에게 병원에 가자고 했다.

"엄마, 손주가 회사에 연차 내고 금요일날 온대. 같이 병원에 가서 진맥 보고 약을 지어먹자."

"싫어. 늙으면 다들 이 정도는 아플 텐데 뭐 하러 병원에 가서 돈을 쓰고 바쁜 애를 오라 그래."

"애들이 가게 시작하면 나도 도와줘야 하거든. 그러려면 엄마가 혼자 버틸 수 있어야지."

"그냥 좀 두고 봐. 이러다 나아질 거야."

매일 몇 번씩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엄마는 극구 싫다고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병원 가자고 한 다음날부터 모든 증세가 호전됐다. 이틀 후엔 식사 중에 맛있다는 말도 했다. 삶의 끝에서도 정신력은 만병통치인 건가? 엄마가 이번에도 다시 극복한 건가? 앞으로 엄마 몸이 안 좋으면 병원 가자고 협박하면 또 낫는 거 아냐?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위기는 넘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반년 전보다 나아진 것은 없었다. 며칠 전에도 엄마는 일어나자마자 훌쩍였다.

"왜 울어 엄마. 무슨 생각이 났는데?"

"그냥 눈물이 나. 죽을 때가 되니까 그냥 서글프고 그렇겠지 뭐. 너희랑 헤어지는 것도 안타깝고, 죽는 것도 무섭고, 거기 가서 어떻게 살지 걱정도 되고."

"그러니까 힘내서 좀 더 살다 가. 죽을 때 엄마는 자는 듯이 슬쩍 갈 거야. 내가 보장해. 저승에 가서는 육체가 없으니 날아다니고 힘도 안 들겠지."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욕이야. 난 빨리 갔으면 좋겠어. 아버지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왜 나를 안 데려가는지 모르겠어. 하긴 내가 뭐 잘한 게 있다고 날 데려가겠어."

"엄마가 잘한 게 왜 없어. 우리 애들 다 키웠는데. 저번 어버이날에 애들이 와서 그랬잖아. 할머니,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나한테는 낳아줘서 고맙다면서."

"그런가? 아니야. 사실은 내가 애들 덕분에 그 오랜 세월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았지. 죽을 때까지 나처럼 편하게 사는 사람 별로 없어. 내가 고맙지. 너한테 고맙고 애들도 고맙고."

다행히 아침에 눈물을 흘린 후엔 종일 평온한 편이었다.


우리 앞집에는 분리공포증을 앓고 있는 강아지가 살고 있다. 이 녀석은 주인이 외출을 하면 주인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짖어댄다. 그 집 앞을 지나면서 동네 사람들은 '시끄러워!' 하고 한 소리씩 하고 간다. 나도 짜증이 난다. 내가 그 녀석의 성대가 망가질 것 같다고 걱정을 하자 엄마가 말했다.

"얘, 뭐라 하지 마. 개가 짖으니까 주변에 사람 사는 것 같고 좋은데 뭘. 에이그, 강아지 신세나 내 신세나 같구나. 쓸모가 없어. 걔가 사람 같으면 서로 오고 가고 얘기나 할 텐데."

"..."


세상을 떠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한다. 몸은 아프고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고 할 일도 없으니 삶은 공허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다. 나도 엄마가 가고 나면 혼자 사는 적막감을 어떻게 해소할지 걱정인데 심신이 바닥인 엄마는 지금 얼마나 힘이 들까. 오죽하면 옆방에 있는 나를 보고 싶다고 부를까.


그래서 요즘 난 엄마에게 각종 소소한 일거리들을 만들어 주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다. 마늘이나 국물용 멸치 쪽파 같은 것들을 한꺼번에 많이 사지 않고 조금씩 사서 엄마에게 다듬게 한다. 내가 음식을 할 때는 엄마도 뭔가를 하도록 시킨다. 된장찌개를 하면서 내가 무와 양파를 썰면 엄마는 호박과 감자를 썰게 한다. 냉면을 하면 내가 물을 끓이고 오이를 써는 동안 엄마는 면을 손으로 비벼서 한 가닥씩 떨어지게 하는 일을 하게 한다. 식사가 끝나면 내가 커피를 타는 동안 엄마는 과일을 썰게 한다. 과일을 깎는 건 엄마가 손목 힘이 없으니 내가 하고 엄마는 썰기만 한다. 그런 식으로 엄마가 거실에 앉아 있을 때 조금씩이나마 일할 거리를 만들고 있다.


엄마는 그렇게 뭐든 손을 움직이고 나면 눈에 띄게 활기차한다. 며칠 전에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시장 물가에 대해, 세상 물정에 대해 한 시간 이상을 얘기했다. 그처럼 열성적으로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은 일 년 만에 처음 보았다. 기침도 거의 멎었다.


이 상태가 좀 오래갔으면 좋겠다. 하루이틀 지나서 또 엄마가 힘들어질까 봐 걱정이다. 엄마가 어디가 안 좋다고 하면 나는 덜컥 겁이 난다.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라 그걸 내가 해결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난다. 내가 힘들어질까 봐 겁이 난다.


겁먹지 말자. 엄마가 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더라도 겁내지 말고 세상을 하직하기 위한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정 해결하지 못하면 엄마를 요양 병원으로 옮기면 되지. 다들 요양원이든 요양병원이든 부모를 보내는데 나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자. 이젠 내 마음에서 엄마를 놓아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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