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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Oct 25. 2022

수상한 알바

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시장조사 알바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알바였다. 사실은 좀 무서웠다. 처음엔 잘 몰랐다.

알바 찾아 각종 알바 사이트에 내 이력서를 넣었었다. 한 회사의 인사 담당이 워크넷에서 내 이력서를 봤다면서 전화를 해왔다. 정부에서 하는 사이트이므로 왠지 신뢰가 가서 공손하게 전화를 받았다.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두 가지 일을 수행하면 된다고 했다. '서류 전달하는 일'과 '시장조사 일'이라고 했다. 그쯤이야, 특히 자동차로 이동하며 하는 일이라고 해서 나는 좋네, 하고 생각했다. 사업자등록증을 보내왔는데 업태가 부동산과 투자대행이었다. 조금 칙칙한 냄새가 났지만 창업한 지 10년이 된 회사여서 일단 믿기로 했다. 특히 근무조건이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신뢰가 가는 측면이 있었다.


출근할 필요는 없고 집에서 대기하다가 업무 지시가 떨어지면 그때 움직이면 된다고 했다. 근무 시간은 평일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기본급이 100만 원이었다. 근무시간에는 반드시 집에서 대기해야 하기 때문에 지급하는 것이라고 했다. 업무 진행비는 별도였다.

서류 전달은 건당 5천 원에서 1만 원, 시장조사는 4만 원에서 6만 원 사이였다. 업무 진행하는 날은 중식비 1만 원이 지급, 기름값도 네이버 네비 거리를 기준으로 충분히 지급한다. 기타 업무 진행비는 영수증을 첨부하면 되고 심지어 인쇄를 내가 집에서 하면 한 장당 500원을 쳐준다고 했다. 지급은 월요일. 주급제였다.

인턴 기간이 있었다. 한 달간 큰 사고 없이 일하면 본사에서 1년 근무 계약을 진행한다고 했다.


나는 조금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나이 든 여자한테 제안하는 일로서는 너무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오후에 다시 전화 달라고 했다. 그 사이에 검색을 해 봤다. 서류 전달은 노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해서 서류 전달하는 알바가 있으니 그 일의 연장인가 보다 했다. 시장조사 알바에 대해서는 누군가 질문을 올린 게 있었다. 그에 대한 답이 '뭘 망설이느냐 그냥 하면 된다.'였다. 그 답을 한 사람에 대해 객관적으로 신뢰할 만한 데이터가 있었다.


오후에 인사 담당이 다시 연락했을 때 나는 일해 보겠다고 했고 인턴 입사 절차를 진행했다. 급여받을 계좌번호, 차량 사진(앞, 뒷면), 신분증 사진, 신분증 들고 셀카 한 장, 긴급연락처 등을 카톡으로 보냈다. 나중에 정식 계약을 한 후 사원증에 쓸 증명사진도 미리 찍어놓으라고 했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나는 코로나 비대면 시기이므로 입사 절차도 그만큼 까다롭게 진행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별도의 업무 담당자가 나에게 배치됐다. 업무는 텔레그램을 사용했다. 고객 보호를 위해 업무 지시는 텔레그램만 쓰고 있었다.


담주 월요일, 아침 9시에 출근 보고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대기했다. 업무 담당자가 사진 이미지를 하나 보내왔다. 업무를 착오 없이 진행하기 위한 연습용으로 인쇄를 한번 해보라고 했다. 나는 인쇄한 것을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합격이라고 했다.


첫날은 그 일로 끝이었다. 종일 대기만 했다. 화요일 아침에 연락이 왔다. 계약서를 하나 인쇄해서 고양시의 한 아파트 정문에서 고객을 만나 전달하면 되는 일이었다.

데이터를 받아 인쇄를 했는데 내용이 좀 이상했다. 제2 금융권과 한 개인, 그리고 내가 소속된 회사의 3자간 계약서인데 개인이 금융회사에 진 채무 상환을 우리 회사가 대행한다는 내용이었다. 3자의 의무 사항들이 부실해서 의아했지만 나는 개인과 우리 회사 간의 별도의 계약이 있을 것이라고 유추하고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채무 상환 능력이 없는 경우 자산관리공사가 채권을 금융기관에서 인수해서 채무자가 약간의 돈만 자산관리공사에 갚고 끝내도록 도와주는 사례들이 있으니 우리 회사도 그런 일을 하는 건가 보다고 생각했다.


고양시 한 아파트에 가서 30분을 기다렸다. 고객이 나타나지 않았다. 업무 담당자인 팀장에게 전화했다. 팀장은 고객이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다고 했다며 경비실에 서류를 맡기라고 했다. 경비실에 맡기려고 갔더니 그런 거 안 맡는다고 딱 잘랐다. 다시 팀장에게 전화했다. 주변에 편의점이 있으면 거기에 맡기라고 했다. 정문 옆에 CU가 있었다. 아파트 주민한테 보내는 것이라고 했더니 다행히 받아주었다.

그날 저녁 5시, 퇴근 보고를 하자 팀장은 그날의 내 급여 내용을 보내왔다. 기름값과 서류 전달비, 중식비까지 충분히 계산돼 있었다. 만족했다.


다음날은 오후에 연락이 왔다. 부평역 근처의 한 건물 주변의 시장조사였다. 가서 보니 허름한 건물이었는데 내 생각에는 건물을 헐고 새로 원룸을 높이 지으면 진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을 중심으로 반경 5킬로 이내를 방사형으로 일일이 걸어 다니며 모든 걸 조사했다. 초등교, 전통시장, 버스 및 지하철 정류장과의 거리, 건물 앞 유동인구까지. 2시간이 걸렸다. 아직 겨울이어서 추웠지만 40분 이상 건물 앞에 서서 유동 인구를 남녀노소와 연령대별로 일일이 세서 숫자를 적었다. 저녁에 자료를 팀장한테 보냈다. 팀장은 그날의 급여 내용을 보내오면서 내가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라고 적어왔다. 나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성실한 나에게는 이런 일이 누워 떡먹기였다.


다음날 아침, 인사담당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침 조례에서 내가 너무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뽑은 사람이라 뿌듯하다며 좋아했다. 나는 우쭐해서 엄마와 아이들한테 자랑을 했다.


목요일은 일이 없었고 금요일에 분당으로 가서 서류를 전달하는 일이 왔다. 다세대주택의 한 우편함에 서류 봉투를 넣고 현장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 마시고 집을 향해 차를 돌리려는데 팀장이 전화했다. 분당 내에서 급하게 시장조사를 해야 할 일이 접수됐다고 했다. 나는 주소지로 차를 돌리고 열심히 조사를 했다. 일이 끝나갈 즈음 팀장이 다시 전화했다.

"지금 수주팀에서 급히 연락이 왔는데요, 이번 건은 조사 항목에 교회 숫자를 추가해 달래요. 나도 오늘 세 건이 걸려 있어서 바쁘니까요, 분당 일 끝나면 보고만 하고 알아서 퇴근하세요."


나는 아주 중요한 건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주변을 다시 돌면서 교회를 조사했다. 네이버 지도상에는 교회가 세 군데뿐이 없었는데 자그마치 10군데에 달했다. 직접 돌아다니며 조사를 하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려 3시간이 걸려서 일을 끝냈다. 발이 많이 아팠지만 일도 하고 건강도 챙긴다는 생각에 기분은 좋았다.


저녁에 데이터를 보냈다. 팀장은 정말 일을 잘한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번 주의 급여 기록을 보내왔는데 무려 25만 원이나 됐다. 이런 식이면 일주일에 3일을, 그것도 반나절만 일하고 월 200만 원 이상을 버는 건데, 엄청난 일자리였다. 주말 동안 식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이제 운이 폈다고 좋아했다.


월요일 아침, 오전 11시경 팀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 회의에서 부장님이 지시하셨는데요, 선생님이 너무 일을 잘하시니까 시장조사팀에서 상환팀으로 승급시키라고 하시네요."

"네? 상환팀이라뇨?"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고요, 고객한테 돈을 받아서 회사 통장으로 입금만 시키면 돼요.

"고객한테서 현금을 제가 받아 와야 한다고요?"

"네."

"현금을 왜 제가 받아요? 고객이 직접 입금하면 되지 않나요?"

"고객 중에는 자기를 드러내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걸 우리가 대행해 주는 거죠."

"...?"


나는 일단 전화를 끊고 잠시 후에 다시 통화하자고 했다. 이건 이상했다.

'채무자가 돈을 채권자 통장에 입금하는 행위가 왜 채무자의 덜미를 잡는다는 거지? 채무자가 지명수배자인가? 근데 왜 인턴에게 현금 수송을 맡기지? 이거 혹시 범죄 조직에 내가 이용당하는 게 아닌가?'

소름이 돋았다. 팀장한테 전화를 했다.

"저, 이 일 그만두고 싶어요."

"아니, 왜요?"

"현금을 운반한다는 게 옳은 일 같지 않아요. 마치 보이스 피싱 같아요."

"아니, 보이스 피싱이라뇨?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전화가 끊어졌다. 지난주 일한 돈은 안 들어왔다. 매주 월요일 입금한다고 했는데... 하지만 돈을 안 보내온 게 오히려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회사 일이 적법하건 불법이건 그냥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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