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잊지못할 고객
그녀는 내가 청소 알바를 할 때의 고객이었다. 내가 일하러 가면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기 때문에 그녀의 밝은 얼굴이 내 머리에 액자가 돼 있다. 미인이었고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여서 매번 감탄하곤 했다. 어투가 조용조용해서 그녀와의 대화는 편안했다. 무엇보다 그녀와 얘기하다 보면 내가 아주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처음 일을 하러 갔을 때 내가 물었었다.
"청소하면서 제가 특별히 주의할 점이 있을까요?"
그녀는 미소 띈 얼굴로 조금 주저하는 듯하며 대답했다.
"별다른 건 없고요. 다만...한 가지 말씀을 드린다면...'갑' '을' 관계로 볼 때 저희가 '을'이잖아요."
"아니, 무슨 말씀을, 제가 당연히 '을'이죠."
"아니예요. 저희가 매니저님(내가 일하뎐 청소 회사에서는 청소하는 아줌마들을 매니저라 칭했었다.)한테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저희가 '을'이죠. 그래서 조심스러워요. 그래도 앞으로 일하실 때 제가 뭐라도 부탁 드릴 수 있을 텐데요, 그럴 때 역정내시지 말고 들어 주시면 고맙겠어요."
'역정 내지 말아달라'는 말을 그녀는 정말 어렵게 했었다. 나는 얼른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전 대답은 잘 해요. 하하."
그 후 그녀의 외손녀들까지 돌보며 2년간 그 집에서 일했는데 한번도 그녀는 나에게 불만을 얘기한 적이 없었다. 부탁을 한 적도 없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그녀의 어법도 한결같았다.
그 집은 부엌 싱크대가 나무로 돼 있었다. 그래서 설겆이를 하면 개수대 주변의 나무 자재에 물이 튀어서 빠른 시일 내에 썩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설겆이를 할 때 수돗물을 분무 식으로 틀어놓고 쓰는 버릇이 있어서 물이 더 많이 튀었다. 그런데도 무심코 버릇대로 쓰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가까이 와서 말했다.
"어머, 매니저님도 물을 그렇게 틀어놓고 쓰시는군요."
그때 문득 알아챘다.
'수도를 분무 식이 아니라 물줄기 식으로 틀어놓고 설겆이를 하면 물이 덜 튀겠구나.'
나는 얼른 수도 꼭지를 물줄기 식으로 바꿨다. 물은 더이상 개수대 바깥으로 튀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매사가 그랬다. 먼저 지적하는 일이 없고 나의 판단에 맡겼다.
내가 일하러 자동차를 몰고 오다가 사고 날 번 했다며 말했었다.
"제가요, 나이가 드니까 확실히 순간 대처 능력이 떨어지네요. 큰일 났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조심해야겠네요."
같은 말을 내가 우리 자식들한테 했을 때 그들은 책망하듯 말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엄마."
그 동안 나도 아이들과 같은 어투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배웠겠지. 우리는 걱정하는 말조차 책망조였다. 그녀와 대화 하면서 나도 그녀처럼 상대방의 기분을 거슬르지 않는 어법을 배우려 했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었다. 평생의 말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평소에 진정 겸허하지 않으면 잘 안되는 습관이었다.
혹시 그녀의 삶 때문에 그런 습관이 들었는지 모른다. 남편이 외교관이어서 평생 해외의 외교 현장에서 내조를 하다보니 말투에 무척 신경썼으리라는 추측은 된다. 외교관 부인이라는 자리는 분명 또다른 외교직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참 존경스러운 부분이었다.
2년간 그녀는 수시로 나에게 선물을 주곤 했었다. 친척이 박스로 보내온 농산물을 나눠주는 먹거리여서 나는 너무 감사히 받곤 했다. 감자, 고구마, 감, 사과 등등. 부부가 함께 강원도에 여행 갔다 올 때면 옥수수 한 푸대를 내 몫으로 따로 사오곤 했다. 그런데 선물을 주면서도 그녀는 혹시 내가 싫어할까봐 염려하곤 했다.
"매니저님, 작년에 우리 친척이 보내준 고춧가루가 그대로 남았는데요, 너무 아까와서요... 정말 좋은 거거든요. 냉동에 보관했던 거라 괜찮을 거 같긴 한데요... 그래도 묵은 거여서 혹시 매니저님이 기분 나빠 하실까 봐 미리 여쭤보는 거예요. 드려도 괜찮을까요?"
"아유, 너무 고맙죠. 요즘 고춧가루가 얼마나 비싼데요."
실제로 받아보니 정말 품질이 좋았다. 내가 햇고추가루를 산다 해도 그보다 좋은 걸 살 수는 없었다. 양도 많아서 일년 내내 먹었다.
나는 그녀와 같은 연배여서 서로 꽤 통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학 시절 얘기도 하고 자식들 얘기도 했는데 실은 우린 서로 굉장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평생 직장에서 일하면서 거칠게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대학 졸업 후 한번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남편을 따라 해외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녔다고 한다. 나는 아이들을 거의 방관하다시피 키웠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아이들 교육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같은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냈었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가 꼭 친구 같았다. 그래서 그 집 일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그녀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녀 남편을 비롯한 식구들의 말 없는 성품 덕이었다.
그 집에서 일한지 몇 개월 후 나는 그녀가 많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됐다. 자기가 외손녀들을 봐줘야 하는데 몸이 아파서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많이 힘드시겠어요."
"할 수 없지요, 뭐. 식구들이 염려를 너무 하니까 한번 열심히 치료해 보고... 그러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면 되고...(그녀는 천주교 신자다.)"
나는 그녀에게 한번도 제대로 된 위로의 말을 해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몰라서 못했다. 말 뿐인 위로는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얘기할 때 그녀의 병환에 대해선 잊어버린 척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녀가 다 나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그건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녀가 나에 대해 배려하면서 맞장구를 쳐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제가요, 요즘 떡 케익을 배우고 있는데요, 나중에 떡케잌 카페를 하면 잘 될 거 같아요."
"어머 괜찮겠네요. 저는 거기서 카운터 볼게요."
"맞다. 고객님은 잘 하실 거 같아요."
"그럼요. 제가 매니저님만큼은 못해도 나름 성실한 사람이거든요.ㅎㅎ"
그 얼마 후부터 나는 그녀의 부탁으로 그녀의 딸네 집에서 외손녀들을 돌보았었다. 그래서 그녀를 자주 볼 수 없었다. 가끔 연락을 했었는데 그녀와 연락이 안되는 때가 있었다. 그런 때는 그녀가 항암 치료를 받는 주였다. 항암 치료를 하는 주는 몸이 몹시 아프다고 한다. 다음 주는 조금 나은 상태가 되곤 한다. 좀 나은 주에 그녀와 연락이 될 때면 전화로 수다를 떨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쾌활해서 병세가 많이 좋아졌나 보다 여기곤 했다. 하지만 나중에 들으니 1년 여간 세 차례나 시술을 했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이 보여서 가슴이 아렸었다.
그녀의 외손녀들이 해외로 떠나는 바람에 그 집 일을 그만둔 다음 그녀를 한번 방문했었다. 몸은 좀 여위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은 너무나 깊고 반짝였다. 나이 들고 아픈 사람인데도 정말 총기 있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날도 그녀는 자신의 고충에 대해선 한 마디 말이 없고 나의 근황에 대해서만 궁금해했다.
"아이들도 잘 지내죠?"
"그럼요. 얼마 전에 둘 다 독립시켰어요. 제가 우리 엄마만 모시고 이사하면서 애들도 각자 원룸으로 이사했어요."
"혼자서들 힘들지 않을까요?"
"다 컸는데요, 뭐. 애인들하고 재미있게 지내겠죠."
"ㅎㅎㅎ 저는 아직 그런 게 잘 안돼요. 전 아마 허락 못할 거 같아요."
"애들 다 결혼시키셨잖아요. 손주들도 너무 잘 크고 있고요."
"네. 다행이죠."
나는 그녀 앞에서 한 시간을 떠들다가 일어설 때쯤에야 겨우 그녀의 건강에 대해 염려의 말을 건넸다.
"요즘 몸은 좀 어떠세요?"
"이번주는 항암 치료가 없어서 지낼 만해요."
"아, 그렇군요."
더이상의 말을 나는 못했다. 말주변이 없는 건지...
아마 그녀는 항암 치료로 아픈 주일 때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몸이 너무 아파서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고 앓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때로 생각에 잠길 때면 그녀가 혼자 통증을 끌어안고 울고 있을 것 같아서 눈물이 나곤 한다.
내가 만일 나중에 몹시 아프게 되었을 때 나도 환한 얼굴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몸이 아프면서도 남을 배려하며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러고 싶다. 그래서 가끔 연습한다. 허리나 관절이 아플 때 얼굴 표정에 신경을 쓴다. 얼굴을 펴고 미소를 지으려 노력해 본다.